책과 글 사이 2010. 4. 3. 01:08

제주풍경화 (風景話)


이제는 먼 기억속의 장소, 제주도는 내가 가 본 몇 안 되는 여행지중의 하나이다. 요즘은 제주도하면 떠올리는 올레길이 생기기 훨씬 전이지만 그때도 제주는 유도화가 줄지어 서있는 가로수와 돌담길, 감귤향 그리고 세상에서 처음으로 본듯한 바다의 색감만 가지고도 세상에 이런곳도 있었나 싶게 며칠간 머무는 동안 내내 마음은 둥둥 떠다녔었다. 게다가 연고지가 전혀 없는 곳도 아니어서 막내고모가 살고 계신 곳이었으니까.

고모댁에서 하루 밤 묵으며 잠이 잘 안 와 이층 베란다에서 바라 본 제주의 여름밤, 더위를 씻으려고 담갔던 물의 감촉, 난생처음 먹어본 문어죽, 산책중에 갑자기 쏟아진 소나기와 비로 씻긴듯 맑아진 햇빛, 그리고 이제는 사진속에서나 만나 볼 뿐인 곳곳의 이국적인 풍경들과 그 시절의 모습들..

정말 오랫만에 옛기억들을 문턱삼아 얼마전 출간된 진광불휘(정원선)님의 책, <제주 풍경화 風景話>속으로 들어가본다. 제목이 말해주듯 335쪽에 달하는 이 책은 제주의 바람과 풍광, 그리고 그 사이를 걸으며 느꼈던 평안과 도취, 행복감에 대한 고백이다. 때로는 삭막하기 그지 없는 도시생활에서 벗어나 삶의 위로를 찾기위해 시작했던 제주로의 이동은 처음의 관광에서 여행으로 바뀌고 또 더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머물고 살고 싶은 정인(情人)같은 곳으로 변모한다. 저자는 직접 발품을 팔아 누구나 알만한 명소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눈길이 닿기 어려운 숨은 풍광까지 사진과 글로 풀어낸다. 상품화되고 정형화된 여행이 아니더라도 가볍게 떠나 홀로 산책하듯 천천히 발견해가는 제주에 대해 이야기한다. 삼양의 해변가에서 만난 "천지간의 황홀" 과 김광석의 '바람이 불어오는 곳' 을 부르면 나타날 것 같은 수월봉, 제목이 블로그 친구분의 닉네임과 같아서 더 친근하게 다가왔던 곽지해수욕장과 빌로우비치호텔, 그리고 이름조차 처음 들어보는 제주의 식물과 먹거리에 이르기까지 그 수고로움과 사유의 자취를 따라 책장을 넘기는 즐거움은 솔솔치 않다. 마침내 책의 마지막 쪽까지 이르러 표지를 덮을때면 "지금, 이 자리에서 제주를 꿈꾸다" 라는 부제의 뜻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것도 같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을때 망설임없이 훌쩍 떠날 수 있는 것, 그것을 부러워만하지 않았나 싶다. 늘 시간과 비용을 핑게거리로 삼아 한 번쯤 꼭 가고싶은 곳, 정작 하고 싶은 것에 대해 눈감고 있지 않았나싶다. 올해 못가면 내년에 가지 후년엔 갈꺼야, 그러다 언젠가 갈꺼야  이런식으로 미루기만 하지 않았나싶다. 그러는동안 생활과 일상으로 포장된 시스템안에 적응하며 안주하는 쪽으로 자리를 잡아 행동으로 옮기는 건 점점 더 어려워지지 않았나싶다. 그렇게 놓쳐가는 소소한 것들과 마주하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 그것이 개인적으로 다가 온 이 책의 또 다른 미덕이기도 하다.


  
제주풍경화 (風景話)

지금, 이 자리에서 제주를 꿈꾸다 
 
정원선 지음
더난 출판사 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