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안의 필름 2010. 5. 26. 00:53

시 Poetry


 



 
이창동 감독이  '시' 라는 제목의 영화를 만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건 작년 겨울 초엽이었던 것 같다. 그 이후로 간혹 검색창에 '시' 를 쳐보곤했었다. 그래봐야 영화의 간략한 내용이나 스틸 한 장 조차 건질 수 없었지만 '시'는 그때부터 내심 기다려온 영화였다. 도대체 어떤 감독이 영화제목을 '시'라고 선뜻 정할 수 있을까 싶었고, 한편 그 사람이 이창동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기도했다. 그의 필모그래피를 떠올리면서 그럴만한 당위성과 기대감을 동시에 가졌던 것 같다.

그리고 지난 연휴 첫날 마침내 '시'를 관람했다. 리뷰를 써야지 하는 사이에  칸영화제에서 각본상을 받았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영화제 심사기준에 대해선 모르겠지만 '시'에  걸맞는 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론 수상이 홍보에 도움이 되어 영화 보던 날 듬성듬성 비어있던 자리들이 꽉 채워졌으면 하는 바램도 가져본다.

사실 리뷰를 쓰고 싶었을때 여러가지 생각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한 가지만 말하고 싶다. 영화 '시'의 가장 강력한 울림은 (적어도 내겐) 미자가 쓴 시, '아네스의 노래'를 그녀와 소녀(희진)의 목소리로 낭송하는 마지막 장면들이었다. 영화 내내 터질 듯 잔잔하게 흐르던 두 개의 상반된 세계가 마침내 여기서 하나로 흐르는 것 같았는데 그래서 관객인 나 자신이 순간 미자와 희진의 존재에 감정이입이 되는 흔치않은 경험을 가지게 된 바로 그 장면이었다.

윤정희씨는 그녀의 본명과 같은 미자(美子) 그 자체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참으로 독특하다. 참담한 현실속에 파묻히지 않고 스스로 아름다움을 찾아가는 그녀의 본성은 하소연하고 원망하고 불평하는 대신 홀로 어쩔 줄 몰라하며 괴로와할 뿐이다. 순간순간(치매 초기현상때문이겠지만) 잊어버리고 다시 기억하면서 늘 가방속에 넣고 다니는 수첩에 한 자 한 자 생각과 상념들을 적어놓는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대체 생각이라는 걸 하는지조차 모르겠는 손자, 욱이의 손톱과 발톱을 깍아주면서 사람은 항상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해야한다고 일러줄땐 여느 할머니와 다름없지만 경찰이 와서 손자를 데려가는 사이 베드민턴을 치는 그녀는 또 다른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인 것 같다. 중학생들이 같은 학년의 여학생을 집단 성폭행한 충격적인 사건앞에서 대부분의 사람(학부모)들이 반응하고 수습하기 위해서 행동하는 방식에서 미자는 비켜서 있다. 


영화의 주제는 쉽지 않은 것이지만 이야기하는 방식은 심각함에 갇혀있지는 않다. 삶은 결국 심각한 것은 아니다. 가장 비극적인 상태의 삶이라 할지라도 삶 안엔 그것에만  매몰될 수 없는 여백이 있을 것이다.  난 '시'가 그 여백을 담았냈다고 생각한다.





* 시

'내안의 필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로제타 Rosetta  (9) 2012.02.05
파수꾼 Bleak Night  (7) 2011.05.14
굿바이 칠드런 Au Revoir les enfants  (2) 2010.03.21
플루토에서 아침을 Breakfast On Pluto  (8) 2010.02.16
'여행자' Une vie toute neuve  (4) 2009.1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