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글 사이 2010. 2. 3. 23:03

눈에 대한 스밀라의 감각


#1 스밀라와 이사야의 대화
"고향에 대한 기본상식은 알아둬야지" "왜요?" "그게 네 뿌리니까..." "에스키모들은 화해할때 서로서로 가슴을 어루만지고 일라가라고 했어. 친구라는 뜻이란다." "일라가"


#2 스밀라가 이사야에게 말한다 

"그들은 이글루에서 바다표범을 사냥했고 얼음위에서 막을 치고 표범을 쫓았다. 그들은 빙원위에서 표범을 기다렸고 카약위에서 작살을 던졌다. 그들은 시퍼런 겨울밤에 사냥을 했다. 에스키모에게 표범은 삶 그 자체다. 이사야 내가 방금 뭐라고했지?"



이 문구를 읽을 때마다 지구상에서 사라져가는 무수한 언어와 단어들이 떠오른다. 그들의 삶과 살림살이를 꾸려왔던 모든 근거와 모체들이, 그 문화와 역사의 총체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소멸되어 간다는 것이  무섭고 슬프다.
 




#3 스밀라와 엘자 뤼빙의 대화

" 눈은 변덕의 상징이죠. 욥기에 나오듯이 말이예요."
"그래요. 그리고 진리의 빛의 상징이기도 하죠. 요한계시록에 나오듯이 말이예요. 그의 머리와 머리카락은 눈처럼 희었더라." "나에게는 나만의 의식이 있어요. 의심이 갈때는 성경을 아무데나 펼쳐보죠. 계시를 얻으려고. 뭐 하느님과 나 사이의 작은 게임이라고 해도 좋아요. 나는 지옥과 죽음의 열쇠를 쥐고있다. 야스페르센 양은 어디까지 가 볼 생각이죠?"  " 끝까지.."


신앙이나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지만 나도 가끔은 엘자 뤼빙식으로 누군가와 작은 게임을 하고 싶다.
"나만의 의식" 은 그 누군가와 나를 이어주는 일종의 사다리 역활이다.




#4 스밀라가 수리공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수학에 대한 단상)

날 행복하게 하는 건 수학밖에 없어요. 눈, 얼음, 숫자... 내게 숫자는 인간사와 다름없어요. 완전하고 양수인 자연수는 어린아이와 같아요. 하지만 인간의 의식은 변하고 아이도 동경심을 갖죠. 동경을 나타내는 수학적 표현이 뭔지 알아요? 음수예요. 뭔가를 잃은 허전함을 형식화 한거죠. 그런 아이들은 이 공간들과 돌, 사람들, 숫자 사이에서 분수를 만들어내죠. 하지만 영원히 멈추진 않아요. 인간은 숫자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어요. 숫자는 지평선을 향하는 대평원의 풍경화예요. 그리인란드처럼. 난 그것없인 못살아요. 감옥엔 못가요."



수학을 이런식으로 느끼고 감각할 수 있는 능력은 어디서 오는걸까? 추상적이라고만  생각했던 수학을 인간사와 비유해서 말 할 수 있다니!  보통사람들은 난해하고 어렵다고만 여기는 문제들이 어떤이들에겐 하나의 이미지처럼 통째로 이해되고 풀이된다. 그건 타고난 능력인가? 아님 배워서 익힌 결과인가? 난 거의 전자라고 생각한다.


#5 이사야의 장례식 장면
관에는 눈이 이미 한 켜 덮혀있다. 눈송이들은 아주 작은 깃털만한 크기다. 사실 눈은 작은 깃털과 같은 방식으로 존재한다. 꼭 차가울 필요는 없다. 어쨋든 이 순간에 중요한 일은 하늘이 이사야를 위해서 울고있다는 것이다. 그 눈물이 얼음 솜털로 변하여 이사야를 덮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우주는 이사야의 몸 위에이불을 끌어 덮어주고 있다. 이사야가 다시는 추워하지 않도록..   


하늘이 이사야를 위해서 울고 있다는 사실, 그것만 기억하자..



원작/ 덴마크 작가 페터 회Peter Hoeg 의 소설
『눈에 대한 스밀라의 감각 Miss Smilla's Feeling for Sn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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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10여년전에  읽었던 <눈에 대한 스밀라의 감각>중에서 몇 구절을 옮겨본다.
내가 읽은 번역본은 까치글방에서 출판된 1996년판으로 당시엔 상.하 두 권으로 출간이 되었었다.
번역은 정영목씨가 맡았었는데 하얀 눈밭 위를 두 팔을 펼치며 날아오르는 스밀라(?)가 그려진 표지의
삽화도 꽤 인상적이었다. 그 후 책은 절판이 되었고 그냥 그렇게 잊혀질뻔 하다가 5년전인가 도서출판
마음산책에서 새로운 번역으로 재출간되었다.
새 번역본은 박현주씨가 맡았고 제목도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Smilla's Sense of Snow』로 바뀌었다.
아직 그 책을 읽어보지는 않았다. 도서관에서 첫 몇 페이지를 잠시 훝어봤는데 나중에 기회가 되면 다시
완독해보고 싶다. 예전에 읽었던 번역본과 어떻게 다르게 다가올지도 자못 궁금해진다. 

<스밀라..>는 내게 잊을 수 없는 작품이다. 소설안에 담긴 스토리의 힘, 캐릭터에 대한 호감과 매력,
그리고 무엇보다 빠르고 입체적으로 전개되는 사건들은 오래된 아카이브를 뒤쳐보듯 흥미진진했다.
북구의 장엄한 풍광과 오래된 성찰로 이루어진 글들에 또 얼마나 마음을 빼앗겼던가. 
같은 종족, 동일한 이방인으로서 스밀라가 이사야에 가졌던 마음은 에스키모 원주민인 엄마가 스밀라에게
주고 싶었던 것과 거의 동질의 것이었으리라. 
평소엔 차갑고 독설도 마다하지 않는 스밀라이지만 그 마음의 바닥은 참으로 따뜻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