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번째 주말, 겨울이 가고 봄이 온 거리를 많이 걸어다녔다.
지난 겨울 눈을 맞으며 만났던 친구를 오랫만에 봤다.
같이 영화를 보고 저녁을 먹었다.
얼마만에 가져보는 시간인지 모르겠다.
어디를 가고 싶다거나 뭘 하고 싶다거나 누굴 보고 싶다거나..
그런 욕구들도 겨우내 잠을 자고 있었는지
이제서야 깨어나 눈 비비고 기지개를 펴는 느낌이다.
광화문에서 헤어지며 그랬다. 담엔 네 생일쯤에 보겠네.
얼마 안 남았잖아. 같이 여행을 가자는 이야기도 했었는데
먼길을 떠나기는 좀 그렇고 당일 다녀오는 기차여행은 어떨까.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진다. 내일 비가 오려나?
이제는 먼 기억속의 장소, 제주도는 내가 가 본 몇 안 되는 여행지중의 하나이다. 요즘은 제주도하면 떠올리는 올레길이 생기기 훨씬 전이지만 그때도 제주는 유도화가 줄지어 서있는 가로수와 돌담길, 감귤향 그리고 세상에서 처음으로 본듯한 바다의 색감만 가지고도 세상에 이런곳도 있었나 싶게 며칠간 머무는 동안 내내 마음은 둥둥 떠다녔었다. 게다가 연고지가 전혀 없는 곳도 아니어서 막내고모가 살고 계신 곳이었으니까.
고모댁에서 하루 밤 묵으며 잠이 잘 안 와 이층 베란다에서 바라 본 제주의 여름밤, 더위를 씻으려고 담갔던 물의 감촉, 난생처음 먹어본 문어죽, 산책중에 갑자기 쏟아진 소나기와 비로 씻긴듯 맑아진 햇빛, 그리고 이제는 사진속에서나 만나 볼 뿐인 곳곳의 이국적인 풍경들과 그 시절의 모습들..
정말 오랫만에 옛기억들을 문턱삼아 얼마전 출간된 진광불휘(정원선)님의 책, <제주 풍경화 風景話>속으로 들어가본다. 제목이 말해주듯 335쪽에 달하는 이 책은 제주의 바람과 풍광, 그리고 그 사이를 걸으며 느꼈던 평안과 도취, 행복감에 대한 고백이다. 때로는 삭막하기 그지 없는 도시생활에서 벗어나 삶의 위로를 찾기위해 시작했던 제주로의 이동은 처음의 관광에서 여행으로 바뀌고 또 더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머물고 살고 싶은 정인(情人)같은 곳으로 변모한다. 저자는 직접 발품을 팔아 누구나 알만한 명소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눈길이 닿기 어려운 숨은 풍광까지 사진과 글로 풀어낸다. 상품화되고 정형화된 여행이 아니더라도 가볍게 떠나 홀로 산책하듯 천천히 발견해가는 제주에 대해 이야기한다. 삼양의 해변가에서 만난 "천지간의 황홀" 과 김광석의 '바람이 불어오는 곳' 을 부르면 나타날 것 같은 수월봉, 제목이 블로그 친구분의 닉네임과 같아서 더 친근하게 다가왔던 곽지해수욕장과 빌로우비치호텔, 그리고 이름조차 처음 들어보는 제주의 식물과 먹거리에 이르기까지 그 수고로움과 사유의 자취를 따라 책장을 넘기는 즐거움은 솔솔치 않다. 마침내 책의 마지막 쪽까지 이르러 표지를 덮을때면 "지금, 이 자리에서 제주를 꿈꾸다" 라는 부제의 뜻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것도 같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을때 망설임없이 훌쩍 떠날 수 있는 것, 그것을 부러워만하지 않았나 싶다. 늘 시간과 비용을 핑게거리로 삼아 한 번쯤 꼭 가고싶은 곳, 정작 하고 싶은 것에 대해 눈감고 있지 않았나싶다. 올해 못가면 내년에 가지 후년엔 갈꺼야, 그러다 언젠가 갈꺼야 이런식으로 미루기만 하지 않았나싶다. 그러는동안 생활과 일상으로 포장된 시스템안에 적응하며 안주하는 쪽으로 자리를 잡아 행동으로 옮기는 건 점점 더 어려워지지 않았나싶다. 그렇게 놓쳐가는 소소한 것들과 마주하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 그것이 개인적으로 다가 온 이 책의 또 다른 미덕이기도 하다.
영화의 어떤 특정한 장면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고 싶을 때가 있다. 그 한 컷만으로도 영화의 의미와 흐름을 유추할 수 있을만큼 상징적이라서, 혹은 평범해 보일지라도 시선을 끌만한 구석이 있어서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고 싶을때가 있다. <굿 바이 칠드런>의 이 장면은 거의 후자에 속할것이다. 더불어 슈베르트의 '악흥의 순간' 이 오버랩 된다는 점에선 전자에도 해당된다.
중학교의 피아노 레슨시간, 줄리앙은 피아노를 치면서 자꾸 음이 틀리고 선생님에게 걱정스런 소리를 듣고 나간다. 그 뒤에 들어온 보네는 앉자마자 악보에 맞춰 완벽하게 슈베르트를 연주한다. 선생님은 점점 놀라와 하며 흐믓한 표정으로 보네를 바라보고 줄리앙역시 놀라지만 한편으론 재수없는 녀석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동급생인 이 두 아이들은 아직은 서로에 대해 잘 모른다. 겨울방학이 끝나고 학기 초 전학 온 보네에게 줄리앙은 호기심을 느끼지만 말 수가 적고 범생이같은 그가 조금은 어렵다. 기숙생활이다보니 자주 마주치고 친해 질 수 있는 기회가 여러번 있었는데도 두 아이들은 좀체로 서로의 거리를 줄이지는 못한다. 그 나이 또래의 남자아이들이란 주먹다짐을 하다가고 금새 풀어지고 사소한 일로 상대방을 거슬리기도 하는 법이니까. 보네와 줄리앙의 관계역시 그런식으로 매번 틀어지곤 한다. 피아노 연주가 서툴러서 자꾸 잘못 치는 음처럼 그 둘의 사이도 그때까지는 그랬었다. 마음이 쓰이고 끌리는데도 가까이 다가가려고 하면 뭔가가 자꾸만 어긋나는 사람들처럼.
영화의 후반부엔 또 다른 피아노 연주장면이 나온다. 피아노 연습을 하던 두 친구가 어느 순간 마음이 맞아서 같이 신나게 피아노를 치는 장면이다. 두 사람의 표정도 모처럼 밝고 구김이 없다. 마침내 한 발자국 서로에게 다가섰구나 하는 그런 느낌을 주는 장면이었다.
몇 년 전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읽은 적이 있었는데 감독겸 시나리오를 쓴 루이 말이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라고 고백하면서 책표지에 쓴 글이 있다. 그 글을 옮겨보는 것으로 이 영화에 대한 나머지 이야기를 대신하고 싶다.
유년기에 대한 한 영화인의 기록과 헌사
『Au revoir les enfants』은 내 유년시절중 가장 비극적인 추억에서 영감을 얻은 것입니다. 1944년 나는 열한살이었고 퐁텐느블로 근처의 카톨릭계 중학교의 기숙생이었지요. 그런데 그 해 연초에 학교에 들어왔던 동급생들 중 한 아이에게 무척이나 마음이 쓰였었어요. 그 앤 뭔가 달라보였고 또 비밀스런 구석이 있어보였거든요. 어느날 아침, 우리의 작은 세계가 무너져 내리던 날 그 친구를 이해하고 사랑하기 시작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1944년 그날 아침이 어쩌면 영화인으로서 나의 소명을 결정해 버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내 변함없는 사랑이었고 신원보증서나 다름없었지요. 그것을 내 첫번째 영화의 주제로 삼았어야 했을 겁니다. 그러나 난 망설였고 또 기다렸어요. 그리고 시간이 흘러갔지요. 추억은 더욱 첨예해졌고, 보다 현재에 가까이 다가왔어요. 미국에서 십여년을 보낸 후, 작년에야 그 순간이 왔다는 걸 느꼈습니다. 그리고 『Au revoir les enfants』의 시나리오를 집필했습니다. 상상력이 기억안에서 점프를 하는 것 같았습니다. 역사적인 사실을 재구성하는 것을 넘어 여전히 마음이 아프고 동시에 시간을 초월한 하나의 진실을 찾아 과거를 재발견한 것이라고나 할까요. 나와 닮은 그 어린 소년의 시선을 통해서 가장 강열했으나 갑자기 부서져버린 그 최초의 우정을, 그리고 폭력과 편견으로 얼룩진 부조리한 어른들의 세계를 다시 찾아내고자 했으니까요. 1944년은 멀리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오늘날의 여느 청소년과 내 이런 심정을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루이 말
루이 말은 2차 세계대전중 프랑스의 한 중학교 기숙사에서 실제로 있었던 유대인 친구와의 짧았던 우정이 어떻게 하나의 영화로서 탄생할 수 있었는지 간결하게 고백하고 있다. 홀로코스트의 비극과 광기가 휩쓸던 시대. 루이 말 자신이었던 줄리앙과 보네는 어렵게 어렵게 조금씩 서로에게 마음을 열어가지만 어느날 아침 보네는 학교까지 수색작업을 한 게쉬타포에 의해 체포되어 아우슈비츠로 끌려간다. 보네를 보호하고 있었던 신부님역시 함께 체포된다. Au revoir les enfants! 은 신부님이 게쉬타포에게 끌려가며 학생들에게 마지막으로 한 작별인사이다.
음악시간에 줄리앙과 보네가 연습했던 슈베르트의 악흥의 순간 2번은 이 영화의 메인 테마곡이다.
개학날 학교로 돌아가기위해 기차역에서 줄리앙과 엄마가 작별인사를 나누는 오프닝신, 그가 기차에 오르면서 흐르기 시작하는 이 음악은 달리는 기차를 따라 먼 유년기의 시간으로 진입하는것 같다. 아직 아무도 모르는 인생의 첫 장을 향해, 최초의 기쁨과 또 최초의 균열이 기다릴 그 시간을 향해서..
* 그리고 또 한가지 피아노 선생님으로 나오는 배우,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은가?
후후 그렇다, 이렌 쟈콥이다. '베로니카의 이중생활' 이나 '레드' 를 기억하고 있다면 저 앳띤 얼굴도
낯익었을테니까. 1987년 작품이니 아마 이렌의 데뷔작이 아니었을까 싶다.
올 3월, 참 유난스럽고 까칠하다. 그동안 얼마나 음산하고 을씨년스러웠는지, 지랄맞은 날씨같으니라구 하고 속으로 얼마나 투덜거렸는지, 이제서야 절반을 끝낸 숙제처럼 이 지겹게 끝나지 않는 겨울의 끝자락에 마침표를 찍어주고 싶다. 봄이 기어이 오긴 올테지만 얼마나 대단하게 오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시나?
" 난 단순히 길 위를 달리는게 아니야. 현자와 함께 길 위를 여행중이지.
수많은 별을 유람하고 화성을 여행하고 플루토(명왕성)에서 아침을 먹을거라고.."
36개의 CHAPTER로 이루어진 패트릭 키튼의 인생과 여정을 담은 영화. 친엄마가 성당 문 앞에 버린 패트릭은 신부님의 손에 의해 남의 집 입양아로 들어간다. 양엄마의 구두와 원피스, 그리고 립스틱을 좋아하는 이 아이는 자신이 남자가 아니라 여성으로서만 존재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양부모나 이웃들은 용납하지 않는다. 호모나 변태취급받으면서 어느덧 성년기에 이른 키튼은 어느날 양아버지로부터 자기를
낳아준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그녀의 이름은 아일린 버긴인데 미치 게이너를 닮았고
금발이라는 것. 언젠가 런던 트라팔가 광장에서 버스를 타고 가는 그녀를 보다가 놓쳐버렸다며
런던이 그 빼어난 미녀를 삼켜버렸노라고.. 그때부터 키튼은 엄마라는 말 대신 '런던이 삼켜버린 유령숙녀' 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엄마라는 말보단 그 편이 덜 슬프니까. 그리고 그 '유령숙녀'를 찾아 런던으로 떠난다.
버림받은 아이, 게다가 성적 소수자의 운명을 걷게 된 키튼의 이야기는그와 비슷한 주제를
담은 다른 영화들에 비해 덜 심각해보인다. "난 심각한 건 딱 질색"이라는 영화 카피처럼 이 영화가 가는 방향은 가볍고 당당한 쪽이다. 여자가 되고싶은 키튼은 당연히 이해받지 못하고
따돌림당하지만 그의 반응은 지극히 단순하고 순수하다. 슬픔과 아픔을 최소화하는 방법으로 그가
택한 것은 나 생긴대로 행동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자신의 정체성때문에 애걸도 저항도 하지 않으며
그것을 수치스러워 하지도 버리지도 않는다. 그의 장난끼 어린 웃음과 마음가는대로 하는 행동들은
극한 상황들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일종의 무기인 셈이다. 무겁고 질식할 것 같은 세상을 향한
가벼움이야말로 키튼의 성향이고 캐릭터이자 동시에 이 영화의 매력(노선)이기도 하다.
매력이라는 단어를 언급한 이상 킬리언 머피라는 배우를 빼놓고 이야기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가 영화의 주연이래서라기 보다는 (요즘은 주인공을 능가하는 조연도 많다) <플루토..>는 킬리언
머피의 영화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킬리언이 키튼을 너무 잘 연기해서 캐릭터가 살아난게 아니라
키튼이라는 인물이 킬리언이라는 배우을 만났기때문에 가능했다고 말해야 할 것 같다. 결국 같은
의미가 된다고 할지라도 그 두가지 표현은 다른 뉘앙스를 가지고 있으므로. 킬리언이 아닌 다른 배우가
연기하는 패트릭 키튼은 상상이 안된다는 말로 대신해야겠다. 다른건 다 차치하고라도 스카이블루에
가까운 그의 눈동자를 어찌 잊을 수 있으리오. 사진으로 보면 평범함에 가까운 외모인데도 순수함과
비열함, 선함과 사악함, 남성과 여성이 혼재해 있는 것 같은 분위기, 적어도 영화나 연극안에선 그
경계선을 넘나들수 있을 것 같은 배우다. * <플루토..>를 보는 즐거움중의 하나는 바로 음악이다! 인상적인 오프닝곡, 슈가 베이비 러브
sugar baby love를 비롯해서 무려 40여곡의 60-70년대 올드팝이 배경음악으로 등장한다.
'유령숙녀'를 찾아가는 키튼의 파란만장한 여정에 동반하는 옛노래들은 영화의 시대배경에 걸맞는
선택이면서 헌정이기도 하다. 어디선가 들어본듯한 음악이 귀에 감기고 키튼의 행적을 쫓다보면
런닝타임 128분이 어느새 지나갔구나 싶어진다.
기본정보: 코미디 | 영국 아일랜드 | 2007.04.05
감독: 닐 조단
주연: 킬리언 머피, 리암 니슨, 스티븐 레아, 브렌단 글리슨
관람등급: 15세이상가
시간: 128 분
별 점: ****
Soundtrack Selections:
“Sugar Baby Love”—The Rubettes “Ghost Riders in the Sky”—(instrm'l; production) “Les Girls film score”—Cole Porter “The Quiet Man film score”—Victor Young “You're Such a Good Looking Woman”—Joe Dolan “Breakfast on Pluto”—Don Partridge “Me & My Arrow”—Harry Nilsson “You're Breaking My Heart”—Harry Nilsson “Running Bear”—Gavin Friday (production) “Wig Wam Bam”—Gavin Friday (production) “Honey”—Bobby Goldsboro “Sand”—Gavin Friday (production) “Me & Mrs Jones”—Billy Paul “Fuck the British Army”—Paddy's Irish Clan “Everyday”—Slade “The Moonbeam Song”—Harry Nilsson “Chirpy Chirpy Cheep Cheep Middle of the Road “The Wombling Song”—The Wombles “Freelance Fiend”—Leafhound “Tell Me What you Want”—Jimmy Ruffin “Feelings”—Morris Albert “Smoke Gets in Your Eyes”—Billy Livesey “Windmills of your Mind”—Dusty Springfield “Caravan”—Santo and Johnny “Children of the Revolution”—T-Rex “No More White Horses”—T2 “For The Good Times”—Kris Kristofferson “Dream World”—Don Downing “For What It's Worth”—Buffalo Springfield “Love is a Many-Splendored Thing Jerry Vale “Suede Flares”—library music “Makes You Blind”—The Glitter Band “Rock Your Baby”—George McCrae “In the Rain”—The Dramatics “Madame George”—Van Morrison “Cypress Avenue”—Van Morrison “Various Cues”—Anna Jordan (production) “Fly Robin Fly”—Silver Convention “How Much is That Doggy”—Patti Page “Handel's Zadok the Priest”—Huddersfield Choral Socie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