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제타 Rosetta
영화가 시작되면 작업복을 입고 긴 복도을 지나 걸어가는 여자의 뒷모습이 보인다. 여자의 얼굴을 볼 수 없지만 뒷모습의 표정만으로도 뭔가 심상치않은 일이 일어날것 같은 분위기가 압도적으로 전해진다. 공장에서 해고당한 여자가 분노를 참으면서 사무실까지 진입하는 이 장면은 꽤 오랫동안 지속된다. 짤린 이유는 일을 못하거나 업무적인 실수를 해서가 아니라 단지 수습기간이 끝났기 때문인데 여자는 몸을 사리지않고 항거하다 끝내 창고로 들어가 문을 잠가버린다. 물론 사람들은 무력으로 여자를 끌어내서 바깥으로 내쫓아버린다. 다소 극적으로 표출된 영화의 도입부 장면들을 카메라는 시종일관 관찰하듯 가감없이 보여준다.
이처럼 오프닝신부터 영화가 끝날때까지 카메라의 눈이 로제타를 떠나는 일은 거의 없는데 그것은 영화가 바라보는 시점이 바로 로제타의 일상이기 때문일것이다. 와플로 끼니를 때우고 헌옷가지를 내다 팔고 혹시라도 일자리가 있을까해서 수퍼나 가게마다 찾아가 확인하는 행위들, 신발이 닳을까봐선지 외출할때만 워커를 신고 주거지인 캠핑카로 들어가는 길목에선 어김없이 나무통에 숨겨놓은 헌장화로 갈아신곤하는 동선들, 만성적인 생리통이 찾아오면 진통제대신에 드라이기를 배에다 대고 마사지하는 장면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로제타가 얼마나 궁색하게 생존을 연명해가는지, 그녀주위엔 보호해주는 사람이나 장치가 전혀 없다는 것에 대한 설명이리라. 사회안정망이라고 불리는 실업급여조차 임시직에 종사한 로제타에겐 해당사항이 없고 술을 얻기위해서라면 매춘도 마다않는 알콜중독자 엄마와는 실강이와 몸싸움까지해가면서 치료를 받도록 설득해야하는것도 로제타의 몫이니까.
임시직으로 와플체인점에서 반죽하는 일을 하게 될 무렵 동료, 리키가 로제타의 어려운 사정을 알고 마음을 써주기 시작한다. 그의 집에서 장화 한 켤레를 얻을 수 있었고 겨우 설탕을 뿌려먹는 토스트지만 양껏 먹을 수 있었다. 음악을 틀어주며 같이 춤추자고 했을땐 관심도 없고 몸도 따라주지 않았지만 그를 따라해 보기도했다. 그날 오랫만에 캠핑카가 아닌 집이라는 공간에서 잠자리에 들며 로제타는 주문처럼 혼자말을 읊조린다.
"너는 로제타, 나는 로제타
너는 일자리가 생겼어, 나는 일자리가 생겼어
너는 친구가 생겼어, 나는 친구가 생겼어
너는 정상적인 삶을 살거야, 나는 정상적인 삶을 살거야
너는 시궁창에서 나올거야, 나는 시궁창에서 나올거야
잘 자, 잘 자 "
그것은 로제타의 간절한 소망이자 꿈, 직업을 가지고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는것, 엄마의 알콜중독이 치료되면 중고재봉틀을 선물하고 수돗물과 가스가 수시로 꾾기지 않은 집에서 살면서 와플이 아닌 평범한 음식을 먹으며 또래친구나 동료와 교류를 하면서 살아가는 것, 그 정도의 바램조차 허락하지 않는 세상에서 살아가는건 시궁창이나 다름없으니까. 취업은 며칠을 못 넘기고 로제타는 다시 실직한다. 지긋지긋한 일상으로의 귀환. 다시 일자리를 구할 수 있을때까지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것일까? 그 일은 또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것인가? 어떤 기회는 시험에 들듯 다가오기도 한다. 그것도 자기에게 도움을 주기위해 손을 내밀었던 사람을 향해서. 로제타는 리키의 일자리가 탐나서 그 자리만 얻을 수 있다면 그가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했고(실수로 강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그에게 선뜻 손을 내밀지 못하고 망설이다 나뭇가지를 건내준다) 체인점 규정을 어긴 그를 고발하면 당장 일자리가 생길 수도 있다는 유혹도 물리치지 않는다. 당연히 그래선 안된다고 말 할 수 있을까, (당신이라면..) 그를 쫓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고 나서도 죄책감보다는 기쁨과 안도감이 우선인 로제타에게 뭐라고 말 할 수 있을까? (당신이라면 ..)
영화는 로제타를 옹호하지 않고 비난하지도 않지만 결국엔 일자리도 친구도 다 잃어버릴 수 밖에 없는 로제타의 벼랑끝 삶을 묵묵하게 보여준다. 로제타를 그렇게 극한 상황으로 몰아가는 것들이 무엇인지 당신들은 이미 알고 있지 않느냐고 말하는것 같다. 그녀에게 사람의 도리를 지키면서 일자리를 찾을때까지 버티라고 그렇게 당신들은 말할 수 있냐고 물어보는것 같다.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된 리키는 그녀가 왜 자기한테 그랬는지 정말 그 이유가 뭔지 알고싶어하는데 가장 가깝게 다가가려했던 그조차도 로제타의 상황, 자기에게 따뜻한 마음으로 대해준 사람을 배신하면서까지 일자리를 구하고 싶었던 그런 절박함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무거운 가스통을 나르면서 로제타는 일자리나 평범한 생활을 꿈꾸는 대신에 차라리 자신이 사라지는 게 낳을지도 모른다는 선택을 할지도 모른다. 표현하기 어려운 먹먹함과 정리되지 않는 어수선한 상념들이 영화관을 나오면서 교차했다.
*
처음으로 본 다르덴 형제의 영화! 아트시네마에서 진행하는 <친구들영화제> 프로그램에 '로제타'가 있었고 예매를 했던 친구가 사정이 생겨 못가는 바람에 내게 티켓을 넘겨주었다. 수십년만에 찾아온 2월의 혹한, 그날은 영하 17도였는데 저녁 8시 아트시네마 안은 사람들의 온기로 훈훈했다. 빈자리가 거의 없이 관객석이 꽉 찼었으니까. 2012년 2월 2일 아트시네마에서 관람.
'내안의 필름' 카테고리의 다른 글
파수꾼 Bleak Night (7) | 2011.05.14 |
---|---|
시 Poetry (6) | 2010.05.26 |
굿바이 칠드런 Au Revoir les enfants (2) | 2010.03.21 |
플루토에서 아침을 Breakfast On Pluto (8) | 2010.02.16 |
'여행자' Une vie toute neuve (4) | 2009.11.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