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안의 필름 2011. 5. 14. 22:23

파수꾼 Bleak Night


 



 어제, 출근길에 우연히 중학교 2~3학년 쯤으로 보이는 남자애들의 대화를 듣게 되었다. 둘은 꽤 친해 보였는데 같이 만나서 학교에 가기로 약속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한 아이가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그 이유와 해명이 구구절절 이어졌다. "존나" "18" 이런 욕들을 절반 이상 주고 받으면서도 연신 웃고 장난치면서 등교길을 가고 있었다. 그 애들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파수꾼>의 장면들이 떠올랐다.

영화엔 그 애들보다 서너살이 더 많은 고등학생들이 등장한다. 기태, 동윤, 희준(백희라고도 부른다)의 이름을 알게 되는 건 그들 중 한 소년의 죽음을 통해서이다. 영화는 가장 극적인 사건, 기태의 죽음을 맨 앞에 불러다놓고 그 주변의 친구들과 반아이들, 그들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환기한다. 현재와 과거 그 보다 더 먼저 있었던 오래된 일들이 아들의 죽음에 뭔가 이유가 있을것이라고 여기는 아버지가 그 진상규명을 하기위해 애써 옮기는 발걸음을 따라 교차된다. 앨범을 뒤적이던 아버진 한 장의 사진을 발견하고 사진속의 그 애들을 직접 찾아나선다.

기태는 어려서부터 야구를 좋아했던 것 같다. 사진 속 꼬마는 야구 방망이를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제 열일곱이 된 소년은 친구들이랑 기차 철길에서 캐치볼을 하며 놀고 있다. 공이 덤불에 떨어지는 바람에 셋이서 주변을 샅샅이 뒤질때 희준은 그냥 다른거 사면 되지 않냐고 하지만 동윤은 "기태가 얼마나 아끼는 공인데" 라는 말로 일축한다. 학교짱인 기태는 기선을 잡는 축에 속하고 희준은 그런 기태의 심기를 살펴가며 움직일 정도로 소극적인 편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미묘한 힘겨루기에서 기태와 거의 동등한 위치에 있는 건 동윤인것 같다. 어느 정도의 긴장이 감돌긴 하지만 세친구 사이의 평화는 그리고 우정은 그렇게 지속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균열의 시초는 언제부터였을까, 그건 아마도 여자친구 문제로 옥신각신하다가 희준이 기태에게 처음으로 자기 의사표시를 하면서 반발하고 그런 희준에게 기태가 "너 많이 컸다" 라는 말로 기선제압에 들어선 순간이 아니었을까싶다. 사실 기태는 희준이 맘에 두고 있던 여자친구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걸 알고 고민끝에 거절한다. 그 두사람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런 진심이 희준에게 전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오해가 싹틀 수 밖에 없는 상황들이 이어지고 한 번 금이 가버린 균열은 예전으로 복구되지 못한다. 오해는 소통을 차단하고 가장 손쉬운 폭력으로 이어진다. 동윤이 기태에게 희준에게 왜 그랬냐고 따지듯 묻지만 기태는 속시원히 그 이유를 말 할 수 없다. '일일이 다 말 하기 어려운 것들', '설명할 수 없는 것들'도 있지 않냐고 하는 그의 답변은 정확한 이유를 댄것보다 오히려 말 할 수 없는 그 자체로 진실에 더 가까이 다가갔다는 생각이 든다. 

숨겨진 이유들은 기태가 마지막으로 동윤을 찾아갔을 때, "어디서부터 잘못된걸까" 라는 거의 독백에 가까운 그 말과 더불어 큰 반향을 일으킨다. 그 장면에서 보여준 기태의 눈빛을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그들은 완벽한 단절을 했고 서로를 영원히 잃어버렸고 이제 결코 돌이킬 수 없는 곳까지 와버렸다. 마음이 아픈건, 기태가 희준을 배려했던 마음, 동윤이 기태의 야구공을 꼭 찾아주려고 했던 그 마음, 기태가 동윤에게 했던 "세상 다 없어져도 나한텐 니가 있잖아, 너만 있으면 돼" 라는 그 고백에도 불구하고 세 친구들은 모두 벼랑끝으로 몰렸다는 것이고 마지막 순간 서로에게 지울 수 없는상처를 남겼다는 것이다. 그들은 "다가갈수록 멀어져" 버렸고 위태로운 끝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보호해주는 파수꾼이 되줄 수 없었다. 난 기태의 아버지가 끝내 아들이 죽은 이유를 알지 못하지만(구체적으로 알지 못하지만) 한편으론 충분히 짐작하고 있을거라고 생각이 든다. 비록 동윤과 만난 자리에서 '묻고 싶은 말'과 '하고 싶은 말'이  드러나지 않았더라도 그것은 동질의 내용, 어떤 '회한'을 담고 있을 것이므로..
 기태가 남긴 때묻은 야구공을 볼때마다 어쩌면 그 먹먹함이 되살아 날 것이므로..
 

 



* 영화 관람하고 며칠이  지났다. 그리고 아직은 그 여운이 내게 남아있다. 사라지기 전에 뭐라도 남기고 싶어 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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