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안의 필름 2012. 2. 5. 23:13

로제타 Rosetta




  
영화가 시작되면 작업복을 입고 긴 복도을 지나 걸어가는 여자의 뒷모습이 보인다. 여자의 얼굴을 볼 수 없지만 뒷모습의 표정만으로도 뭔가 심상치않은 일이 일어날것 같은 분위기가 압도적으로 전해진다. 공장에서 해고당한 여자가 분노를 참으면서 사무실까지 진입하는 이 장면은 꽤 오랫동안 지속된다. 짤린 이유는 일을 못하거나 업무적인 실수를 해서가 아니라 단지 수습기간이 끝났기 때문인데 여자는 몸을 사리지않고 항거하다 끝내 창고로 들어가 문을 잠가버린다. 물론 사람들은 무력으로 여자를 끌어내서 바깥으로 내쫓아버린다. 다소 극적으로 표출된 영화의 도입부 장면들을 카메라는 시종일관 관찰하듯 가감없이 보여준다. 

이처럼 오프닝신부터 영화가 끝날때까지 카메라의 눈이 로제타를 떠나는 일은 거의 없는데 그것은  영화가 바라보는 시점이 바로 로제타의 일상이기 때문일것이다. 와플로 끼니를 때우고 헌옷가지를 내다 팔고  혹시라도 일자리가 있을까해서 수퍼나 가게마다 찾아가 확인하는 행위들, 신발이 닳을까봐선지 외출할때만 워커를 신고 주거지인 캠핑카로 들어가는 길목에선 어김없이 나무통에 숨겨놓은 헌장화로 갈아신곤하는 동선들, 만성적인 생리통이 찾아오면 진통제대신에 드라이기를 배에다 대고 마사지하는 장면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로제타가 얼마나 궁색하게 생존을 연명해가는지, 그녀주위엔 보호해주는 사람이나 장치가 전혀 없다는 것에 대한 설명이리라.  사회안정망이라고 불리는 실업급여조차 임시직에 종사한 로제타에겐 해당사항이 없고 술을 얻기위해서라면 매춘도 마다않는 알콜중독자 엄마와는 실강이와 몸싸움까지해가면서 치료를 받도록 설득해야하는것도 로제타의 몫이니까.

임시직으로 와플체인점에서 반죽하는 일을 하게 될 무렵 동료, 리키가 로제타의 어려운 사정을 알고 마음을 써주기 시작한다. 그의 집에서 장화 한 켤레를 얻을 수 있었고 겨우 설탕을 뿌려먹는 토스트지만 양껏 먹을 수 있었다. 음악을 틀어주며 같이 춤추자고 했을땐 관심도 없고 몸도 따라주지 않았지만 그를 따라해 보기도했다. 그날 오랫만에 캠핑카가 아닌 집이라는 공간에서 잠자리에 들며 로제타는 주문처럼 혼자말을 읊조린다.

"너는 로제타, 나는 로제타

 너는 일자리가 생겼어, 나는 일자리가 생겼어
 너는 친구가 생겼어, 나는 친구가 생겼어
 너는 정상적인 삶을 살거야, 나는 정상적인 삶을 살거야
 너는 시궁창에서 나올거야, 나는 시궁창에서 나올거야
 잘 자,  잘 자 "

그것은 로제타의 간절한 소망이자 꿈, 직업을 가지고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는것, 엄마의 알콜중독이 치료되면 중고재봉틀을 선물하고 수돗물과 가스가 수시로 꾾기지 않은 집에서 살면서 와플이 아닌 평범한 음식을 먹으며 또래친구나 동료와 교류를 하면서 살아가는 것, 그 정도의 바램조차 허락하지 않는 세상에서 살아가는건 시궁창이나 다름없으니까. 취업은 며칠을 못 넘기고 로제타는 다시 실직한다. 지긋지긋한 일상으로의 귀환. 다시 일자리를 구할 수 있을때까지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것일까? 그 일은 또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것인가?  어떤 기회는 시험에 들듯 다가오기도 한다. 그것도 자기에게 도움을 주기위해 손을 내밀었던 사람을 향해서. 로제타는 리키의 일자리가 탐나서 그 자리만 얻을 수 있다면 그가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했고(실수로 강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그에게 선뜻 손을 내밀지 못하고 망설이다 나뭇가지를 건내준다) 체인점 규정을 어긴 그를 고발하면 당장 일자리가 생길 수도 있다는 유혹도 물리치지 않는다. 당연히 그래선 안된다고 말 할 수 있을까, (당신이라면..) 그를 쫓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고 나서도 죄책감보다는 기쁨과 안도감이 우선인 로제타에게 뭐라고 말 할 수 있을까? (당신이라면 ..)


영화는 로제타를 옹호하지 않고 비난하지도 않지만 결국엔 일자리도 친구도 다 잃어버릴 수 밖에 없는 로제타의 벼랑끝 삶을 묵묵하게 보여준다. 로제타를 그렇게 극한 상황으로 몰아가는 것들이 무엇인지 당신들은 이미 알고 있지 않느냐고 말하는것 같다. 그녀에게 사람의 도리를 지키면서 일자리를 찾을때까지 버티라고 그렇게 당신들은 말할 수 있냐고 물어보는것 같다.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된 리키는 그녀가 왜 자기한테 그랬는지 정말 그 이유가 뭔지 알고싶어하는데 가장 가깝게 다가가려했던 그조차도 로제타의 상황, 자기에게  따뜻한 마음으로 대해준 사람을 배신하면서까지 일자리를 구하고 싶었던 그런 절박함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무거운 가스통을 나르면서  로제타는 일자리나 평범한 생활을 꿈꾸는 대신에 차라리 자신이 사라지는 게 낳을지도 모른다는 선택을 할지도 모른다. 표현하기 어려운 먹먹함과 정리되지 않는 어수선한 상념들이 영화관을 나오면서 교차했다.


*
 처음으로 본 다르덴 형제의 영화! 아트시네마에서 진행하는 <친구들영화제> 프로그램에 '로제타'가 있었고 예매를 했던 친구가 사정이 생겨 못가는 바람에 내게 티켓을 넘겨주었다. 수십년만에 찾아온 2월의 혹한, 그날은 영하 17도였는데 저녁 8시 아트시네마 안은 사람들의 온기로 훈훈했다. 빈자리가 거의 없이 관객석이 꽉 찼었으니까.  2012년 2월 2일  아트시네마에서 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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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안의 필름 2011. 5. 14. 22:23

파수꾼 Bleak Night


 



 어제, 출근길에 우연히 중학교 2~3학년 쯤으로 보이는 남자애들의 대화를 듣게 되었다. 둘은 꽤 친해 보였는데 같이 만나서 학교에 가기로 약속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한 아이가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그 이유와 해명이 구구절절 이어졌다. "존나" "18" 이런 욕들을 절반 이상 주고 받으면서도 연신 웃고 장난치면서 등교길을 가고 있었다. 그 애들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파수꾼>의 장면들이 떠올랐다.

영화엔 그 애들보다 서너살이 더 많은 고등학생들이 등장한다. 기태, 동윤, 희준(백희라고도 부른다)의 이름을 알게 되는 건 그들 중 한 소년의 죽음을 통해서이다. 영화는 가장 극적인 사건, 기태의 죽음을 맨 앞에 불러다놓고 그 주변의 친구들과 반아이들, 그들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환기한다. 현재와 과거 그 보다 더 먼저 있었던 오래된 일들이 아들의 죽음에 뭔가 이유가 있을것이라고 여기는 아버지가 그 진상규명을 하기위해 애써 옮기는 발걸음을 따라 교차된다. 앨범을 뒤적이던 아버진 한 장의 사진을 발견하고 사진속의 그 애들을 직접 찾아나선다.

기태는 어려서부터 야구를 좋아했던 것 같다. 사진 속 꼬마는 야구 방망이를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제 열일곱이 된 소년은 친구들이랑 기차 철길에서 캐치볼을 하며 놀고 있다. 공이 덤불에 떨어지는 바람에 셋이서 주변을 샅샅이 뒤질때 희준은 그냥 다른거 사면 되지 않냐고 하지만 동윤은 "기태가 얼마나 아끼는 공인데" 라는 말로 일축한다. 학교짱인 기태는 기선을 잡는 축에 속하고 희준은 그런 기태의 심기를 살펴가며 움직일 정도로 소극적인 편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미묘한 힘겨루기에서 기태와 거의 동등한 위치에 있는 건 동윤인것 같다. 어느 정도의 긴장이 감돌긴 하지만 세친구 사이의 평화는 그리고 우정은 그렇게 지속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균열의 시초는 언제부터였을까, 그건 아마도 여자친구 문제로 옥신각신하다가 희준이 기태에게 처음으로 자기 의사표시를 하면서 반발하고 그런 희준에게 기태가 "너 많이 컸다" 라는 말로 기선제압에 들어선 순간이 아니었을까싶다. 사실 기태는 희준이 맘에 두고 있던 여자친구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걸 알고 고민끝에 거절한다. 그 두사람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런 진심이 희준에게 전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오해가 싹틀 수 밖에 없는 상황들이 이어지고 한 번 금이 가버린 균열은 예전으로 복구되지 못한다. 오해는 소통을 차단하고 가장 손쉬운 폭력으로 이어진다. 동윤이 기태에게 희준에게 왜 그랬냐고 따지듯 묻지만 기태는 속시원히 그 이유를 말 할 수 없다. '일일이 다 말 하기 어려운 것들', '설명할 수 없는 것들'도 있지 않냐고 하는 그의 답변은 정확한 이유를 댄것보다 오히려 말 할 수 없는 그 자체로 진실에 더 가까이 다가갔다는 생각이 든다. 

숨겨진 이유들은 기태가 마지막으로 동윤을 찾아갔을 때, "어디서부터 잘못된걸까" 라는 거의 독백에 가까운 그 말과 더불어 큰 반향을 일으킨다. 그 장면에서 보여준 기태의 눈빛을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그들은 완벽한 단절을 했고 서로를 영원히 잃어버렸고 이제 결코 돌이킬 수 없는 곳까지 와버렸다. 마음이 아픈건, 기태가 희준을 배려했던 마음, 동윤이 기태의 야구공을 꼭 찾아주려고 했던 그 마음, 기태가 동윤에게 했던 "세상 다 없어져도 나한텐 니가 있잖아, 너만 있으면 돼" 라는 그 고백에도 불구하고 세 친구들은 모두 벼랑끝으로 몰렸다는 것이고 마지막 순간 서로에게 지울 수 없는상처를 남겼다는 것이다. 그들은 "다가갈수록 멀어져" 버렸고 위태로운 끝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보호해주는 파수꾼이 되줄 수 없었다. 난 기태의 아버지가 끝내 아들이 죽은 이유를 알지 못하지만(구체적으로 알지 못하지만) 한편으론 충분히 짐작하고 있을거라고 생각이 든다. 비록 동윤과 만난 자리에서 '묻고 싶은 말'과 '하고 싶은 말'이  드러나지 않았더라도 그것은 동질의 내용, 어떤 '회한'을 담고 있을 것이므로..
 기태가 남긴 때묻은 야구공을 볼때마다 어쩌면 그 먹먹함이 되살아 날 것이므로..
 

 



* 영화 관람하고 며칠이  지났다. 그리고 아직은 그 여운이 내게 남아있다. 사라지기 전에 뭐라도 남기고 싶어 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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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시선 2010. 10. 5. 00:37

전주향교




2010년 8월 5일, 폭염이 하늘을 찌르던 계절, 여름휴가차 다녀온 곳은 전주였다.
사진은 한옥마을 입구, 오목대 근처에 자리잡은 전주향교의 입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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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낮에게 2010. 9. 20. 19:40

지난 여름, 다가올 가을


날짜를 보니 블로그에 글을 올리는 게 딱 석 달 만이다. 마지막으로 포스팅한 날은 6월 20일, 그때만해도 이렇게 오랫동안 집을 비우게 되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간혹 들어와서 글을 올릴것이라고 여겼고 사실 여름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가끔씩 들어와 글쓰기 창을 열기는 했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을뿐 키보드는 늘 제자리에서 멈췄다. 그것 말고는 특별한 이유나 핑게거리가 없다. 유난스런 폭염과 폭우로 하늘 평안할 날이 없었던 날씨탓 같기도하고 140자면 충분한 트위터가 블로그보다 더 쉽게 느껴졌던 것 같기도 하고 그렇다. 

여느때처럼 집과 사무실을 왔다갔다 하면서 간혹 영화에 빠져 지내기도 하고 여름휴가때는 친구와 함께 전주를 다녀오기도 했다. 한옥마을을 산책하다  비를 피해 찾았던 찻집에서 독특한 방식으로 여러번 걸러서 마셨던 황차의 맛은 지금도 가끔 그립다. 찻집 주인이 자분자분하게 일러주던 황차의 효력과 그녀가 입었던 갈빛 한복, 정원쪽으로 난 자리에 앉아 빗줄기가 잦아지는 걸 보며 친구와 이런저런 이야기 나눴던 시간들은 이제 블로그의 이야깃감으로 소개하기도 너무 늦어버렸다. 

추석연휴가 시작된 오늘, 낮엔 미용실에 가서 여름내 무성히 자란 머리를 단발로 잘랐다. 머리뿐만 아니라 마음도 정돈되고 가뿐해진 느낌이다. 엄마는 나물과 탕국을 할 재료를 준비하시고 나도 일손을 돕는다. 밖에 나간 동생이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막힌다고 전화가 왔다. 오늘 저녁은 좀 늦어질 것 같다. 배가 고프면 밥은 맛있기 마련, 연휴의 첫 날 저녁나절이 소소하게 지나고 있다.


*
이제 블로그를 다시 시작합니다. 지금보다는 자주 글을 올리려고해요.  긴 글이 쓰고 싶어졌거든요. 
추석연휴 동안 친구분들 마실도 다니고 안부인사도 전해야겠죠..
그런데, 모두들 안녕하시죠?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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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낮에게 2010. 6. 20. 19:43

오랫만이다


오랫만이다, 예전부터 글을 자주 올리는 편은 아니었지만 올 들어선 블로그를 왜 자꾸 이렇게 방치하게 되는지 모르겠다. 바빠서라거나 글을 올릴 만한 것들이 없어서 라고 말하기도 그렇다. 하나의 이유는 되겠지만 모든 이유는 아니므로. 사실 그동안 글로 옮기고싶은 일상의 글감들은 꽤 많았다. 하루의 삼분의 일 이상을 보내는 직장이라는 좋은 먹이감 외에도 길을 떠났던 원주와 홍천에 대한 풍경과 사진들, 친구와 사무실 초대권으로 관람한 연주회와 오페라에 대한 리뷰, 간혹 집에서 나홀로 봤던 몇 편의 오래된 영화들, ... 
예전같으면 그 중 절반 정도는 글이나 사진으로 옮기기위해 기억하고 기록하는 수고로움을 기꺼이 했을터인데 올해는 그렇지 못한 것 같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렇다.  이것도 하나의 과정이겠지.
여름이다. 더위와 장마가 교차되는 계절, 아침에 일어가는 게 겨울보다 수월하고 출퇴근길이 덜 고생스럽다는 걸 위안삼아 되도록 웃는 날이 조금 더 많기를 기대하면서.. 모든 분들도 평안하고 건강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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