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낮에게 2009. 8. 28. 23:45

여름의 끝에서


오늘부터 8월 말까지 하나씩..


1.
퇴근길의 지하철 안이었다. 나는 서 있었고 언제쯤 자리가 나려나 하는 생각을 하며 무심히 사람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내가 서 있던 자리 앞 옆에 앉아 있는 여자가 눈에 들어 왔다. 놀랍게도 그 여자는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검은색 가방에서 바느질 꾸러미를 내놓고 아주 천천히 공을 들여서 한 땀 한 땀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여자가 열중해서 만드는 건 아기 옷이었다. 처음엔 배내옷인가 했는데 옷의 중심을 잡으려고 펼쳤을 때 보니 가운과 비슷한 겉옷 같았다. 겨우 큰 손수건 2장 정도 크기의 곰돌이 모티브가 들어간 면 가운, 여자는 아기의 목과 피부가 닿을 가장자리 부분을 안쪽으로 두 겹씩 접고 그 접힌 부분이 흩으러지지 않도록 옷 핀으로 조심스럽게 고정시킨 후 바늘에 실을 꿰어서 한 땀 한 땀 시침질을 하고 있었다. 그 일련의 과정들은 매우 천천히 이루어졌는데 여자의 바느질 솜씨가 뛰어난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자태안에서 우러나오는 조용한 집중력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도 남는 것이었다. 잠시동안이었지만 바늘을 놀리는 그녀의 손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 사이 서너 정거장이 지나가고 여자는 바느질을 멈추더니 주섬주섬 꾸러미에 옷가지를 넣고 가방을 들고 지하철 안을 빠져 나갔다.  (8.28)


 

2.
오늘 하루종일 집에 있는 LP레코드판 목록을 정리했다. 클래식은 작곡가와 곡명 연주자와 오케스트라 레이블까지 옮기다보니 생각보다 시간이 꽤 걸렸다. 작곡가는 바하와 베토벤 모짜르트 쇼팽 슈만 슈베르트순으로 많은 것 같고 교향곡보다는 협주곡이나 실내악에 편중되어있다. 연주자중엔 피에르 푸르니에 와 정경화, 안느 소피 무터,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 마르타 아르게리히, 아르투르 루빈스타인, 에밀 길레스,요요마 등의 이름이 꽤 있었고 카라얀 시절의 베를린 필 하모니와 다니엘 바렌보임의 시카고 교향악단과의 협연, 보자르 트리오와 아마데우스 콰르테의 연주가 눈에 띈다. 레이블은 도이취그라모폰과 필립스, 엔젤, 데카, RCA등이 압도적이다. 나머지는  pop과 영화음악, 가요와 실내악순이다. <아마데우스><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미션><라붐>을 비롯해서 <동물원><이승환><김민기><한동준>의 앨범들, 심지어 난 이름조차 첨 들어보는 '김익호의 애수의 테너 쎅스무드'(^^;) 라는 판도 있었다. 조지 마이클이 솔로로 데뷔하기 전 활동했던 듀오,<wham>의 앨범도 보인다. 한마디로 올드한 LP컬렉션이다.  8월 한 달 주말마다 작업을 했는데 이제 오늘로서 마무리가 된 셈이다. 이렇게해서 아빠가 남긴 클래식을 비롯한 총 600여장의 레코드가 엑셀파일로 저장되었다. 비로서 한 가지 과제물을 끝냈다. (8.29)


 

3.
일요일은 늘 조금 더 늦잠을 자고 거의 아침겸 점심을 먹는다. 꿈도 가끔씩 꾸는데 오늘 아침나절엔 희안한 꿈을 꾸었다. 꿈이 완전 4차원이다. 기억나는 장면 하나를 묘사하면 이렇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난 긴 복도를 지나 겨우 몸 하나 빠져나갈 수 있을 듯한 창문 앞에 다다랗다. 그 곳에서 나가야하는데 다른 방도는 없고 창문에서 뛰어 내려야 한다. 완전히 네모난 유리창인데 밖을 내다보니 아득할 정도의 높이이다. 그런데 난 별로 무서워하지도 않고 뛰어 내린다. 몸이 허공을 가르고 수직으로 떨어지는 느낌- 꿈이었지만 실제같았다- 이 꽤 오랫동안 지속되었는데 순간 무엇인가 내 몸을 바치면서 그 안으로 안전하게 착지한다. 사람들이 커다란 방수포같은 걸 들고 날 받아 준것이다. 등으로 바쳐주는 어떤 손길이 느껴졌다. 그런데 내가 도착한 곳은 지상이 아니라 수십미터 위에 떠 있는 어떤 도시의 내부였다. ... 3D 입체영화를 봐도 이런 느낌이 들까?  (8.30)


 

4.
8월의 마지막날, 낮에 잠시 시간을 내서 씨네큐브에 들렸다. 오늘은 이곳이 고별인사를 하는 날, 백두대간의 마지막 상영작은 <디스 이즈 잉글랜드>다. 낮 2시 25분 걸 봤다. 영화관 안은  꽤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영화를 보러 온 사람들이겠지만 마지막 자취를 담기 위해 일부러 들린 이들도 있는 듯 했다. 한 쪽에선 9월1일부터 아흐레간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열리는 <큐브 베스트10 영화제>에 대한 행사가 있었고 씨네큐브 홈페이지 게시판에 고별의 아쉬움을 남긴 이들을 추첨해서 '타인의 취향' 무료상영을 하고 있었다. 한편 그동안 씨네큐브에서 상영한 영화의 필름을 통째로 갖다 놓고 마음에 드는 걸 골라서 잘라 가는 행사도 있었다. 나도 그 중 몇 장을 골라왔다. 그 중 하나가 '박쥐'에서 드라큘라가 된 상현이 맨발의 태주를 살짝 들어올려서 신발을 신키는 장면이다. 즉석에서 폰카로 몇 컷 찍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받았던 생일축하의 문자들  ^^ ;
이렇게해서 하루가 또 지나간다. 평범했지만 또 특별하기도 했던 8월 31일, 그런대로 기억에 남을 생일날이었던 것 같다. (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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