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안의 필름 2009. 10. 29. 00:49

가을 소나타 Hostsonsten





가을 소나타 Hostsonaten (1978)

감독 /  잉그마르 베르히만 Ingmar Bergman
촐연 / 잉그리드 버그만 Ingrid Bergman,
             리브 울만 Liv Ullmann
 

 

첫 십분 정도는 놓쳤었고 내가 본 첫 장면은 샬롯(어머니)과 사위가 나누던 대화였다. 어머니는 딸(에바)한테 무슨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건 아닌가하고 물었던 것 같다. 이 두 모녀는 좀 이상하다. 엄마와 딸 사이인데 상당히 오랫동안 서로 떨어져 있었던 것 같고 (떨어져 있었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건 아니지만) 겉으로 보이는 친절함과 배려에도 불구하고 뭔가 어색한 분위기가 흐른다. 두 사람 사이에 뭔가 있었던걸까? 하는 의문이 생기기 시작하는 것은 잠자리에 들려는 샬롯과 딸 에바가 나누는 대화에서이다.

딸은 멀리서 온 어머니를 정말 손님 대하듯 마치 호텔 지배인이 투숙객의 시중을 들듯 그렇게 챙겨준다. 모녀 사이의 살가움이라기보단 의식적인 애정표현같이 보인다. 그러다 샬롯이 에바에게 쵸코렛 상자를 선물하는데 에바가 거절하자 "어렸을땐 쵸콜렛을 좋아했었잖니?" 라고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순간 에바의 얼굴이 굳어지면서 "쵸콜렛을 좋아한 건 제가 아니라 헬레나였어요" 라고 대답한다. 어머니의 당황한 얼굴이 스쳐간다. 그래 뭔가 있긴 있구나. 심각한 뭔가가 있어.. 그런 느낌. 곤히 잠자던 샬롯이 가위에 눌려 깨어나 거실로 나온다. 딸 에바도 기척소리에 따라나온다. 거실엔 두 사람만 있다. 공기가 무겁다. 굳게 입을 다문 두 모녀. "날 사랑하니?" - "그럼요 엄마인데." 어색한 질문에 어색한 대답. 아마도 샬롯이 딸의 결혼생활에 대해서 무슨 문제가 있느냐는 질문을 던진 것 같다. 에바는 갑자기 참견하려 드는 엄마에게 신경질적인 반응을보이고 엄마는 딸을 사랑하고 염려해서 그렇다는 확신을 주고 싶어하고. 두 사람의 마음이 통하지 못한다는 것이 확연히 들어나는 장면이었다.
에바가 말문을 연다. 어린시절에 대한 이야기다.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 샬롯 때문에 자신과 거의 말을 못하는 동생 헬레나, 그리고 아버지가 얼마나 고통스럽고 외로운 삶을 살았어야 했는가를. 늘 피아노 연주회 연습하느라 독방에 들어앉아 있는 엄마를 아주 먼 발치에서 그것도 잠깐씩 면회하듯이 바라만 봐야했던 것. 엄마의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서 자신의 볼품없는 모습을 한심스러워 했던 것. 지방으로 해외로 피아노 연주 여행을 떠나는 엄마를 엽서를 통해서만 만날 수 있었던 것. 아주 특별한 엄마를 둔 덕분에 집안일이며 동생 돌보는 일이며 외로운 아버지의 말동무 역활까지 해내야 했던 유년기와 소녀시절을 에바는 떠올린다.

어머니는 마치 자신을 원망하고 단죄하는듯한 딸의 고백을 듣고 있기가 두렵기만하다. 이 어머니는 상당히 자기방어적이다. 딸이 이야기를 할때 마다 들어주고 이해하려기보단 아니라고, 그럴 수 밖에 없었노라고 대답한다. 하긴 그녀의 입장에서보면 그것이 사실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이 두 모녀의 관계는 애초부터 보편적인 엄마와 딸 사이와는 아주 멀리 떨어져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단지 엄마가 피아니스트로서의 자신의 삶을 지속하기 위해서 가정생활을 포기해야 했기 때문에 딸은 엄마를 원망하는걸까? 그것도 한 이유가 될 수도 있겠지만 그 무엇보다 에바가 샬롯을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은 자신이 버림 받았다는 사실 때문이다. 자기와 말 못하는 여동생 헬레나가 일찌감치 엄마와의 끈에서 잘려져 나왔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 고통과 분노를 에바는 너무도 오랫동안 깊은 상처로 숨겨왔었다. 한편 샬롯은 자기가 늘 딸 에바를 두려워 했었다고 고백한다. 자신에게 너무 많은 걸 요구할까봐. 자신이 줄 수 없는 것을 요구할까봐서. 샬롯은 에바와 헬레나의 엄마가 되는 것이 싫었다고 말한다. 무섭고 두려웠다고... 아마도 그것이 이 두 모녀 사이에 있는 애증의 원인이었을 것이다.

샬롯 역시 자신의 어린시절을 에바에게 들려준다. 아주 엄격하고 까다로운 부모님 밑에서 자랐던 어린시절을. 부모님과 그 어떤 스킨십도 부재했던 유년기와 오로지 음악으로서만 자신을 표현 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해서. 그녀는 그녀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애정의 결핍이 유전처럼 대물림을 한 것이리라. 그리고 그 상처가 곪을대로 곪아서 이제 그 속살을 드러내고 있다. 에바는 단 한 번도 사랑을 주지 못한 어머니를 향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투정부리고 때쓰듯 원망을 쏟아내고 "지금까진 용캐도 운명이 엄마의 편에 서 있었지만 이제 더 이상의 행운은 없고 지금까지 미뤄온 부채의 댓가를 치뤄야 한다" 고 단호하게 말한다. 그 말에 결정적으로 샬롯의 마음은 돌아서고 다시 문을 굳게 닫아 버린다. 두 모녀가 전쟁을 치루듯 대화를 나누는 동안 또 다른 딸 헬레나가 방에서 뛰쳐나와  엄마를 부른다.

그러나 헬레나를 돌보러 달려가는 건 샬롯이 아니라 에바이다. 어머니 샬롯은 헬레나를 감당하지 못한다. 딸의 말을 알아 듣지도 못할 뿐더러 그러한 상황이 그냥 두렵고 피하고만 싶으니까. 그리고 이튼날 날이 밝기가 무섭게 샬롯은 딸의 집을 떠난다. 기차안. 샬롯과 그의 동반자의 여행길, 샬롯의 공허한 눈빛과 고독감 그리고 고백의 말 "난 너무도 외롭고 추워서 서둘러 집을 찾아가지만.. 막상 집에 도착하면 내가 찾고 있었던건 다른 곳에 있다는 걸 알게되요." ...아! 어쩔 수 없이 자신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는 삶의 모습들! 이라니. 그리고 다시 또 시간이 지나간다. 에바는 엄마에게 편지를 쓴다. 용서의 편지를. 자기가 엄마에게 했던 몹쓸 행동을 용서하라고. 아픈 엄마를 괴롭혀서 잘못했다고. 엄마를 사랑한다고. 그리고 이젠 용서할 수 있다고. 그 편지가 샬롯에게 전해졌는지 그리고 샬롯과 에바가 서로를 용서하고 화해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여기까지, 비로서 샬롯이 있는 그대로의 엄마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  영화가 말해 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인듯 싶다. 
 
 자신을 원망하며 울부짓는 딸을 바라보는 샬롯의 절망적인 표정
 

엄마에게 자신의 고통스러웠떤 유년시절을 고백하는 에바, 리브울만의 폭팔적인 연기!          


영화의 거의 마지막 장면, 에바가 엄마 샬롯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으며 동네를 산책한다.
엄마가 다시 찾아와 주기를 기다리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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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그리드 버그만은 암투병중에 생애의 마지막으로 이 영화를 찍었다. 잉그마르 베르히만 역시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고백하는 마음으로 이 영화를 찍었다고 한다. 영화를 보면서 '샬롯'이라는 인물은 잉그리드 버그만과 베르히만의 또 다른 페르소나 일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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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본 지  꽤 오래되었다. 제목처럼 가을에 올리려고 한 것은 아닌데 매우 늦은 리뷰가 되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