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글 사이 2010. 4. 22. 00:07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

 


어김없이 황혼녘이면

그림자가 나를 끌고 간다
순순히 그가 가자는 곳으로 나는 가보고 있다

세상 모든 것들의 표정은 지워지고
자세만이 남아 있다

이따금 나는 무지막지한 덩치가 되고
이따금 나는 여러 갈래로 흩어지기도 한다

그의 충고를 따르자면
너무 빛 쪽으로 가 있었기 때문이다
여러 개의 불빛 가운데 있었기 때문이다

茶山은 국화 그림자를 완상하는 취미가 있었다지만
내 그림자는 나를 완상하는 취미가 있는 것 같다

커다란 건물 아래에 서 있을 때
그는 작별도 않고 사라진다

내가 짓는 표정에 그는 무관심하다
내가 취하고 있는 자세에 그는 관심이 있다 
  

그림자 없는 생애를 살아가기 위해
지독하게 환해져야 하는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

지금은 길을 걷는 중이다 순순히
그가 가자는 곳으로 나는 가보고 있다 


'빛의 모퉁이에서'
김소연「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 」


*
도시락과 잡다한 물건들로 가득찬 가방에서 반찬국물세례까지 받으며
봄날을 꿋꿋하게 버텨낸 책, 운이 좋아 버스안에 자리를 잡아 앉게되면
습관적으로 꺼내읽게 되던 시집, 소설이나 산문에 정착하지 못한
몇 주간동안 누구와 닮아보이는 행과 행 사이를 서성거렸다. 

직장생활이란  예측할 수 없는 슬럼프의 연속이다. 
슬럼프에서 빠져나오는 순간과 다시 들어가는 그 순간 사이를 되도록 길게 유지할 것
파도타기를 즐기는게 아니라면 물결이 되도록 완만하게 흘러가게 하자
 
내가 기억하는 가장 더웠던 봄날은 1994년이었고
(4월초 날씨가 26도를 웃돌아서 그때부터 반팔티를 입었던 기억이..)
아마도 내가 기억하는 가장 춥고 봄같지 않은 봄날은 올해가 될듯 싶다.
이 기록이 깨지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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