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안의 필름 2009. 6. 8. 20:40

사랑후에 남겨진 것들, Kirschblüten- Hanami



 
바닷가 앞에서 노년기에 접어든 두 사람이 파란색 숄(그땐 숄이라고 여겼었다)안에  감겨있다. 
이 압도적인 블루의 색감때문에 벽 한 면을 차지하고 있던 포스터를 처음 봤을땐
오로지 풍경과 제목만이 눈에 들어왔었다. 하나의 덩어리처럼. 
 <사랑후에 남겨진 것들> 이라니.. 그런데 영어제목은 cherry blossoms이라고?
대체 무슨 이야길까?  저 두사람은 친구인가 부부인가? 그렇게 궁금해하던게 벌써 두 계절 전이다.

포스터안의 두 사람은 트루디(아내)와 루디(남편)이다. 그들의 상반신을 통째로 감싸고 있는 것은 숄이 아니라 트루디가 늘상 입고 있던 가디건이다. 손으로 짠 평범한 가디건. 부부는 지금 발틱해를 여행중이다.  바닷가를 산책하던 날 햇빛은 좋았지만  바람이 불었고 추워하는 루디에게 트루디는 자신의 가디건 팔 한쪽을 건내준다. 이렇게해서 두 사람이 한 벌의 가디건을 같이 입고 있는 장면이 연출된 것이다.

풀어놓을 이야기들이 한 보따리라고 말 하고 싶은 영화였다. 영화의 내용뿐만 아니라 한 장면 한 장면의 색감이 뛰어났고 그냥 통째로 스틸을 올려놓고 싶을 정도로 예쁘고 아름다운 컷들이 많았다. 사실 포스터의 저 장면 하나만으로도 영화의 전반부는 다 설명이 될 수가 있을 것이다. 늘 후지산을 동경하고 여행하고 싶었던 트루디는 루디가 불치의 병에 걸려 시한부 삶을 살고 있다는 걸 알게된다.  영화는 남편 없이 혼자 후지산을 가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라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냐는 트루디의 독벽으로 시작한다. 언젠가는 떠나겠지, 늘 시간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루디의 병을 알고 난 후에도 적어도 둘이서 후지산을 여행할 시간은 있으리라 여긴다. 하지만.. 

그 보다 먼저 베를린에 있는 큰아들네와 딸을 보러가지만 갑작스럽게 닥친 부모님이 마냥 반가울 수만은 없는 자식들, 어느덧 부모와 자식이라는 관계는 "우리는 걔들을 모르고 걔들은 우리를 모른다" 라는 루디의 말로 요약될 수 밖에 없는 것인지.. 공감은 하면서도 그냥 좀 쓸쓸해지는 장면들이 이어진다.  발틱해를 여행하게 된 것도 실은 시간을 내기 어려운 자식들에게 더 이상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서이다.

하지만 죽음을 선고받은 루디보다 트루디가 먼저 세상을 떠난 후 영화는 본격적으로 이야기 끈을 풀어놓기 시작한다.  '벗꽃' 혹은 '벗꽃구경'이라는 원제 대신 쌩뚱맞은 <사랑후에 남겨진 것들>이라는 한글제목을 택한 이유중의 하나는 영화의 후반부의 내용이 십분 작용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트루디의 삶에선 남편과 아이들외에 소중했던 것이 있었다. 거의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고 루디마져 미쳐 그 정도까지인 줄은 깨닫지 못한 그녀의 분신이자 꿈 말이다. 평생 그녀를 따라 다녔지만 평소엔 눈길조차 주지 않았던 그림자같은 것, 영화는 그 꿈이 그녀가 배우고 싶어하던 격렬한 몸짓의 부토춤일 수도 있고 후지산의 벗꽃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어쩌면 루디에게 트루디의 사랑은 그녀가 준비한 양배추롤 일 수도 있을 것이다. 두 사람이 한 벌의 가디건안에서 롤처럼 감겨 있는 장면은 얼마나 상징적인가! 루디는 도쿄체류중 막내아들 칼에게 아내가 자기에게 해 준 것처럼 양배추 롤을 만들어준다. 루디를 버리고 트루디가 되어보는 것, 그의 몸 안에 살아있는 그녀의 그림자를 되살려 보는 것, 그것이 또 루디가 아내에게 보내는 마지막 사랑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내의 옷을 입고 그녀가 보고 싶어하던 일본의 풍경과 후지산, 벗꽃을 구경시켜 주는 것 말이다. 그러다 어느날 공원에서 만난 부토춤을 추는 소녀 유에게 루디는 그림자춤 이라고 불리는 부토을 배운다. 유와 루디는 함께 부토춤을 추지만 실은 유와 루디 그리고 트루디가 같이 어울려 추는 것 같았다. 루디는 트루디가 평소 즐겨입던 기모노를 입은 채 후지산 앞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아들과 딸, 친혈육도 몰랐던 트루디와 루디의 삶의 한 부분을  먼 이국땅에서 만난 열여덟살의 소녀, 유는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다. 유는 여전히 공원에서 트루디나 루디와 더불어 이야기를 하고 부토춤을 추고 있다. 손에는 분홍색 전화기를 들고서..


사랑후에 남겨진 것들, Kirschblüten - Hanami, Cherry Blossoms-Hanami

 감독: 도리스 되리(2008년/ 독일. 프랑스)
 출현: 엘마 베퍼(루디) 하넬로레 엘스너(트루디), 아야 이리즈키, 막시밀리안 브뤼크너
 음악: Kanno Yoko의 'Little Black Book'

카노 요코의 '리틀 블랙 북'은 영화의 메인테마곡이다. 영화의 분위기와 너무 잘 어울리는 음악이다.

엘마 베퍼와 하넬로레 엘스너같은 배우들과 영화를 찍을 수 있었던 도리스 되리는 행운아라고 해야 할 듯, 물론 그 반대의 말도 성립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