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안의 필름 2009. 11. 14. 23:38

'여행자' Une vie toute neuve



마침내 포스터 한 장을 올리긴 하는데..  
이 영화에 대해선 거의 나오는 대로 글을 써내려갈 수 밖에 없을 듯하다.
하긴 내가 쓰는 리뷰가 거의 다 그렇긴 하지만.



영화의 전체적인 스토리는 70년대 중반, '여행을 떠나듯' 아빠의 손에 이끌려 가톨릭계 보육원에 맡겨진 아홉살의 여자아이가 프랑스라는 먼 곳으로 입양을 가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영화이다.
채 열 살도 안 된 어린 아이에게 일어난 갑작스러운 이별과 사랑하는 아빠가 자신을 버렸다는 걸 깨닫게 되기까지의 그 지난한 확인들, 그리고 죽음과 삶의 경계선까지 치닫게 되는 지독함까지도 담담하게 보여준다.  아이는 왜 자기가 고아원에 있어야 하는지 이해 하지 못한다. 다른 아이들처럼 부모님이 안 계신 것도 아닌데 그럴 리가 없다고 말한다. 아빠가 꼭 자기를 다시 찾아 올 것이라고 굳게 믿으며 보육원의 아이들과 자기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빠는 오지 않는다. 보육원의 큰언니와 아이들이 밤새 화투놀이를 하는 도중에  화투패를 본 아이가 "손님이 오셨네" 한다. 다른 아이가 진희를 지목하며 "새로 들어온 아이처럼? " 하고 묻자 큰언니는 "그 앤 손님이 아냐 우리와 같이 살거거든" 하고 대답한다. 자기는 손님이라고 여기던 진희는 그 소릴 듣고서야 비로서 여느 아이들처럼 이곳에 있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어느날 신체검사를 하는 와중에 의사 선생님이 진희에게 "왜 여기에 왔는지 알고 있니" 라고 물었을때  아이는 거의 울먹이면서 "아기 때문에" 그런거 라고 대답하는데 이유인 즉 언젠가 동생인 아기를 안아주려고 했는데 갑자기 아기가 울었고 그 통에 엄마 아빠가 달려와서 보니 아기 발에 옷핀이 찔려서 피가 났었다고 말한다. 부모님은 옷 핀 땜에 아기가 죽을 뻔 했다고 생각한거다 라고 대답한다. 그러니까 진희는 아빠가 자기를 고아원에 데려 온 이유가 있을거라고 골똘히 생각했던 것 같다.  자신과 옷핀은 아무런 관련도 없음에도 그 일때문에 고아원에 버려진 거라고.. 그렇게 해서라도 어떤 타당한 이유를 찾아 내고 싶었던 것일까?




시간이 지나며 진희는 보육원에서 알게 된 숙희언니와 친해지고 차츰 정을 붙여간다. 두 아이는 같은 곳으로 함께 입양을 가기로 약속까지 하지만 숙희는 훌쩍 혼자서 미국인 부부를 따라 고아원을 떠난다. 아이들이 입양을 떠날 때마다 의식처럼 치뤄지는 고별식에서 부르던 노래,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  그리고 노래의 후렴구, " 그 속에서 놀 던 때가 그립습니다"
뭐가 그리 그리울까? 이곳을 떠난 아이들이 이곳을 그리워하게 될까? 모든 아이들을 공평무사하게만 대하던 이곳을?  누군가에게 특별히 사랑받고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가 될 수 없는 이곳을? 아니면 남아 있는 아이들이 먼저 떠난 아이들을 부러워하며 그리워할까? 어느쪽이건 진희에겐 남아 있는 그리움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거구나,  이렇게 또 날 홀로 남기고 떠나는구나. 같이 있고 싶은데 그렇게 될 수가 없는 거구나 라는.. 고된 학습뒤에  깨달은 체념섞인 분노외엔.  

숙희가 떠난 후 진희는 더 말이 없어진다. 외국에서 보육원에 선물로 보내준 인형들을 줴다 망가뜨리고 매사에 반항적이 되간다. 그리고 예전에 숙희언니랑 같이 돌봐주던 새가 죽었을때 묻었던 자리를 찾아가 그 자리의 흙을 퍼 내고 자기 몸이 들어갈 만한 웅덩이를 만든다. 그 자리에 들어가 흙을 덮고 스스로를 매장한다. 그렇게 해서 숙희와의 기억을 묻어버린다. 아니 아빠에 대한 기억과 그 이전의 삶들과 이별을 고한다. 



그리움과 배신감, 기억과 잊어버림, 버림받음과 거둬짐, 그런 일련의 깨달음으로 굴곡지고 비틀려진 시간들을 뒤로 하고  아이는 이제 받아 들이기 시작한다. 원장선생님은 진희에게 먼 외국에서 보내온 양부모의 사진을 보여주며 마음에 드냐고 묻는다. "무섭게 생겼어요" "하지만 좋은 분이시란다. 너에게 잘 해 줄거야"  파리로 떠나는 비행기를 기다리는 진희의 목에는 입양하는 아이에게 걸어주는 증명서가 걸려있다. 아이는 이제 먼 여행을 떠난다. 파리에 도착한 아이는 대기실에 기다리고 있는 양부모를 향해 걸어간다. 그때의 진희의 표정을 결코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자신 앞에 놓여진 새로운 삶 앞에서 자신은 오직 '여행자' 일 거라는 사실과
그것이 앞으로 어떻게 펼쳐질 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여행은 계속된다는 것과 더불어서..



*
'여행자'는 우니 르콩트(Ounie Lecomte)라는 한국계 프랑스인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은 영화이다. 그녀는 1970년대 9살의 나이로 프랑스로 입양을 가서 성장했다. 그녀의 본명이 은희 라고 들었는데 아마도 은희라는 이름을 불리는대로 옮기다보니 우니(ounie)가  된 것이 아닐까 라는 추측을 해 본다.



**
진희 역을 맡았던 김새론 이라는 어린 배우에 대해서 한 마디 안 할 수 가 없다. 그 엄청난 감정의 소용돌이와 어른들도 직접 경험한 것이 아니면 짐작조차 하기 어려울 상황들을 그 정도로 소화하고 표현할 수 있다니!! 그저 놀라울 뿐이지만 저걸 힘들어서 어찌 촬영했을까? 라는 걱정 반 감탄 반을 하면서 열살 남짓한 이 배우가  '여행자'에서 보여준 것은 배우고 익힌 것이라기 보다는 거의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던것이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안의 필름 2009. 10. 29. 00:49

가을 소나타 Hostsonsten





가을 소나타 Hostsonaten (1978)

감독 /  잉그마르 베르히만 Ingmar Bergman
촐연 / 잉그리드 버그만 Ingrid Bergman,
             리브 울만 Liv Ullmann
 

 

첫 십분 정도는 놓쳤었고 내가 본 첫 장면은 샬롯(어머니)과 사위가 나누던 대화였다. 어머니는 딸(에바)한테 무슨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건 아닌가하고 물었던 것 같다. 이 두 모녀는 좀 이상하다. 엄마와 딸 사이인데 상당히 오랫동안 서로 떨어져 있었던 것 같고 (떨어져 있었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건 아니지만) 겉으로 보이는 친절함과 배려에도 불구하고 뭔가 어색한 분위기가 흐른다. 두 사람 사이에 뭔가 있었던걸까? 하는 의문이 생기기 시작하는 것은 잠자리에 들려는 샬롯과 딸 에바가 나누는 대화에서이다.

딸은 멀리서 온 어머니를 정말 손님 대하듯 마치 호텔 지배인이 투숙객의 시중을 들듯 그렇게 챙겨준다. 모녀 사이의 살가움이라기보단 의식적인 애정표현같이 보인다. 그러다 샬롯이 에바에게 쵸코렛 상자를 선물하는데 에바가 거절하자 "어렸을땐 쵸콜렛을 좋아했었잖니?" 라고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순간 에바의 얼굴이 굳어지면서 "쵸콜렛을 좋아한 건 제가 아니라 헬레나였어요" 라고 대답한다. 어머니의 당황한 얼굴이 스쳐간다. 그래 뭔가 있긴 있구나. 심각한 뭔가가 있어.. 그런 느낌. 곤히 잠자던 샬롯이 가위에 눌려 깨어나 거실로 나온다. 딸 에바도 기척소리에 따라나온다. 거실엔 두 사람만 있다. 공기가 무겁다. 굳게 입을 다문 두 모녀. "날 사랑하니?" - "그럼요 엄마인데." 어색한 질문에 어색한 대답. 아마도 샬롯이 딸의 결혼생활에 대해서 무슨 문제가 있느냐는 질문을 던진 것 같다. 에바는 갑자기 참견하려 드는 엄마에게 신경질적인 반응을보이고 엄마는 딸을 사랑하고 염려해서 그렇다는 확신을 주고 싶어하고. 두 사람의 마음이 통하지 못한다는 것이 확연히 들어나는 장면이었다.
에바가 말문을 연다. 어린시절에 대한 이야기다.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 샬롯 때문에 자신과 거의 말을 못하는 동생 헬레나, 그리고 아버지가 얼마나 고통스럽고 외로운 삶을 살았어야 했는가를. 늘 피아노 연주회 연습하느라 독방에 들어앉아 있는 엄마를 아주 먼 발치에서 그것도 잠깐씩 면회하듯이 바라만 봐야했던 것. 엄마의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서 자신의 볼품없는 모습을 한심스러워 했던 것. 지방으로 해외로 피아노 연주 여행을 떠나는 엄마를 엽서를 통해서만 만날 수 있었던 것. 아주 특별한 엄마를 둔 덕분에 집안일이며 동생 돌보는 일이며 외로운 아버지의 말동무 역활까지 해내야 했던 유년기와 소녀시절을 에바는 떠올린다.

어머니는 마치 자신을 원망하고 단죄하는듯한 딸의 고백을 듣고 있기가 두렵기만하다. 이 어머니는 상당히 자기방어적이다. 딸이 이야기를 할때 마다 들어주고 이해하려기보단 아니라고, 그럴 수 밖에 없었노라고 대답한다. 하긴 그녀의 입장에서보면 그것이 사실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이 두 모녀의 관계는 애초부터 보편적인 엄마와 딸 사이와는 아주 멀리 떨어져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단지 엄마가 피아니스트로서의 자신의 삶을 지속하기 위해서 가정생활을 포기해야 했기 때문에 딸은 엄마를 원망하는걸까? 그것도 한 이유가 될 수도 있겠지만 그 무엇보다 에바가 샬롯을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은 자신이 버림 받았다는 사실 때문이다. 자기와 말 못하는 여동생 헬레나가 일찌감치 엄마와의 끈에서 잘려져 나왔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 고통과 분노를 에바는 너무도 오랫동안 깊은 상처로 숨겨왔었다. 한편 샬롯은 자기가 늘 딸 에바를 두려워 했었다고 고백한다. 자신에게 너무 많은 걸 요구할까봐. 자신이 줄 수 없는 것을 요구할까봐서. 샬롯은 에바와 헬레나의 엄마가 되는 것이 싫었다고 말한다. 무섭고 두려웠다고... 아마도 그것이 이 두 모녀 사이에 있는 애증의 원인이었을 것이다.

샬롯 역시 자신의 어린시절을 에바에게 들려준다. 아주 엄격하고 까다로운 부모님 밑에서 자랐던 어린시절을. 부모님과 그 어떤 스킨십도 부재했던 유년기와 오로지 음악으로서만 자신을 표현 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해서. 그녀는 그녀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애정의 결핍이 유전처럼 대물림을 한 것이리라. 그리고 그 상처가 곪을대로 곪아서 이제 그 속살을 드러내고 있다. 에바는 단 한 번도 사랑을 주지 못한 어머니를 향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투정부리고 때쓰듯 원망을 쏟아내고 "지금까진 용캐도 운명이 엄마의 편에 서 있었지만 이제 더 이상의 행운은 없고 지금까지 미뤄온 부채의 댓가를 치뤄야 한다" 고 단호하게 말한다. 그 말에 결정적으로 샬롯의 마음은 돌아서고 다시 문을 굳게 닫아 버린다. 두 모녀가 전쟁을 치루듯 대화를 나누는 동안 또 다른 딸 헬레나가 방에서 뛰쳐나와  엄마를 부른다.

그러나 헬레나를 돌보러 달려가는 건 샬롯이 아니라 에바이다. 어머니 샬롯은 헬레나를 감당하지 못한다. 딸의 말을 알아 듣지도 못할 뿐더러 그러한 상황이 그냥 두렵고 피하고만 싶으니까. 그리고 이튼날 날이 밝기가 무섭게 샬롯은 딸의 집을 떠난다. 기차안. 샬롯과 그의 동반자의 여행길, 샬롯의 공허한 눈빛과 고독감 그리고 고백의 말 "난 너무도 외롭고 추워서 서둘러 집을 찾아가지만.. 막상 집에 도착하면 내가 찾고 있었던건 다른 곳에 있다는 걸 알게되요." ...아! 어쩔 수 없이 자신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는 삶의 모습들! 이라니. 그리고 다시 또 시간이 지나간다. 에바는 엄마에게 편지를 쓴다. 용서의 편지를. 자기가 엄마에게 했던 몹쓸 행동을 용서하라고. 아픈 엄마를 괴롭혀서 잘못했다고. 엄마를 사랑한다고. 그리고 이젠 용서할 수 있다고. 그 편지가 샬롯에게 전해졌는지 그리고 샬롯과 에바가 서로를 용서하고 화해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여기까지, 비로서 샬롯이 있는 그대로의 엄마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  영화가 말해 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인듯 싶다. 
 
 자신을 원망하며 울부짓는 딸을 바라보는 샬롯의 절망적인 표정
 

엄마에게 자신의 고통스러웠떤 유년시절을 고백하는 에바, 리브울만의 폭팔적인 연기!          


영화의 거의 마지막 장면, 에바가 엄마 샬롯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으며 동네를 산책한다.
엄마가 다시 찾아와 주기를 기다리는 것 같다.


 


*
잉그리드 버그만은 암투병중에 생애의 마지막으로 이 영화를 찍었다. 잉그마르 베르히만 역시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고백하는 마음으로 이 영화를 찍었다고 한다. 영화를 보면서 '샬롯'이라는 인물은 잉그리드 버그만과 베르히만의 또 다른 페르소나 일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
영화를 본 지  꽤 오래되었다. 제목처럼 가을에 올리려고 한 것은 아닌데 매우 늦은 리뷰가 되버렸다.
내안의 필름 2009. 10. 4. 10:55

심심해서 만들어 본 영화퀴즈


추석연휴중 심심해서 만들어 본 영화퀴즈입니다.
심심풀이로 해보면 재밌을 것 같아서요 ^^;
다 맞출 필요도 없고, 놀이라고 생각하고 들어가세요~


10월 4일 현재 2분이 퀴즈에 답해 주셨는데
혹시 다른 분들도 참여하실지 몰라서 정답은 10월 9일쯤에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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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안의 필름 2009. 9. 10. 23:54

디스이즈잉글랜드, 타인의 삶, 빵과 장미



재밌게 봤으나 가슴 한 구석이 먹먹해지면서 아픔같은것이 자리 잡는다. 1983년 영국의 초등학생 션이 열두살의 해를 지나며 커가는 성장영화라고 말 할 수 있겠다. 한편으론 그 시대가 가지고 있던 치부들, 이를테면 스킨헤드와 민족주의의 어두운 면을 표출하면서 그것이야 말로 잉글랜드의 진짜모습이었노라고 이야기한다.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고 그렇다고 아빠 없이 힘겹게 살아가는 엄마에게 어리광을 부릴 처지도 아닌 션은 어느날 동네의 형아들, 우디와 그의 패거리를 만나게 된다. 한참이나 어린 그를 우디는 호의를 가지고 받아준다. 그들과 어울리며 전쟁놀이를 하고 스킨헤드처럼 머리를 밀고 연상의 누나와 키스도 경험하면서 션은 아빠가 돌아가신 이후로 가장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스킨헤드족을 지향한다고는 하지만 우디의 패거리들은 스킨헤드를 하나의 패션정도로 여겼을 뿐이다. 그런데 우디의 친구인 콤보가 감옥생활을 마치고 그룹에 합세하면서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게 돌변한다. 그는 인종차별주의가 가장 현실적이라고 여기고 민족주의가 애국주의라면서 우디의 맴버들에게 누구를 따를것인지 선택을 강요한다. 션에겐 아킬레스건이나 다름없는 전쟁에서 전사한 아빠의 명예를 운운하며 어린 그의 마음을 흔들어놓는다. 뭐가 옳고 그른지 판단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션은 아빠를 영웅이라고 하는 콤보의 곁에 남게된다. 그러나 콤보의 실체가 드러나면서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 빠지게 되고 급기야는 돌이킬 수 없는 엄청난 폭력과 비극을 목격하게 된다.  급류에 휩쓸려 갈 듯 하던 열두살의 그 해 여름방학.., 이제 막 빠져나온 션에게 엄마는 괜찮냐고 물어본다. 션은 고개을 끄덕인다. 그리고 혼자서 찾은 바닷가 해변, 빨강색 십자가 그려진 잉글랜드의 국기를 허공을 향해 던져버린다.



(8월 31일 광화문 씨네큐브에서 관람, 백두대간의 마지막 상영작)



뜨겁게 달궈졌던 눈물샘이 마지막 장면에서 터지고야 말았던
드라이만의 소설 첫 장에 헌정된 이 문구
 
HGWXX/7
gewidmet,
in Dankbarkeit

왜 사람들이 <타인의 삶>을 이야기하는지 이제서야 알고 말았지만 영화의 첫 장면부터 엔딩 크레딧이 끝까지 올라갈때까지 정말 한 순간도 정신을 놓을 수 없었다. 흥미진진하고 재밌고 감동적이기까지하다.  아무래도 난 독일영화 팬이 되버릴 것 같다. <파니 핑크><굿바이 레닌><사랑후에 남겨진 것들>에 이어 <타인의 삶>까지..  동독의 비밀경찰 비즐러가 드라이만과 트리스타의 삶을 감시하고 도청하면서 서서히 변화하는 과정들, 브레이트의 詩를 읽으며 눈물을 흘리는 그 시점에서 6-7년이 지난 후 자기에게 헌정한 드라이만의 소설책을 사면서 엷게 웃음짓는 장면까지, 비즐러가 살았던 '타인의 삶'은 이제 온전히 자신의 삶이 되버렸다.


(9월 4일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관람)




<칼라 송>과 <레이디버드 레이디버드>에 이어 3번째로 보는 켄 로치의 영화다.  그의 영화들은 제3세계나 사회의 비주류층 사람들의 삶에 대한 성찰과 메시지를 담고 있지만 교훈적이라든가 어떤 희망을 보여주지는 않는듯 싶다. 2000년작인 <빵과 장미>역시 그 연장 선상에 있다고 말 할 수 있다. 영화는 담요속에 숨어서 멕시코 국경을 넘어 미국으로 들어온 마야가 언니의 도움으로 로스 엔젤레스의 환경미화원 청소부로 일하게 되면서 겪게 되는 생존권(빵)과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품위를 유지하며 살 권리(장미)에 대한 투쟁을 담고 있다. 그렇다고 빡빡하고 고단한 이야기만 펼쳐지는 것은 아니다. 불법이민자로서 살아가지만 마야는 천성적으로 밝고 자존심이 강하며 유머감각이 있는 여성이다. 포스터의 광고문구처럼 어느날 그녀의 휴지통안으로 들어온 남자, 샘은 노동운동가인데 매우 열정적이지만 한편으론 싱거워보이는 면도 있고 솔직히 목숨을 걸고 사생결단하듯 그렇게 싸우는 스타일은 아닌듯 싶다. 그는 조직적으로 착취당하고 부당하게 대우받는 환경미화원들에게 노동과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찾을 것을 주장하지만 선뜻 이주노동자들과 충분한 공감대를 형성하지는 못한다. 시급 5달러짜리 환경미화원 자리를 뺏기면 그대로 막다른 골목으로 몰릴게 뻔한 그들과 연봉 수천달러를 받는 샘과는 사회적 괴리가 있을 수 밖에 없지만  마야는 그런 이유때문에 샘의 진심을 의심하지 않는다. 함께 토론하고 고민하면서 마야는 점점 노조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느낀 엔젤 컴퍼니쪽에선 10여년 경력을 가진 미화원을 회유해서 주동자를 색출하려고 하지만 실패하자 그녀를 비롯한 미화원전원을 해고시킨다. 해고된 사람들과 샘 마야는 단결해서 전원복직과 의료보험을 비롯한 노조결성을 위한 시위를 시작하고 그들은 마침내 승리를 거두게 된다. 하지만 이제 모두가 희망을 걸어 볼 만하다고 생각할 그 시점에서 마야는 절도죄(친구의 대학 등록금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저지른)로 검거되어 그녀가 넘어온 멕시코 국경으로 추방된다.

 

(9월 6일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관람)



*
8월말에서 9월 초로 이어지던 일주일은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다른 일을 시작하기 전에 가진 휴식기간이나 다름없었다. 여름의 끝에 찾아온 휴가처럼 친구도 만나고 보고 싶은 영화도 보고 빈둥거리면서 지냈다.  덕분에 그동안 보고 싶었던 영화 3편을 내리 볼 수 있었다. 이런 시간이 또 언제쯤 찾아올런지..

내안의 필름 2009. 8. 24. 21:50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 Buena Vista Social Club





Road Movies Filmproduktion presents
Buena Vista Social Club
Directed by 
Wim Wenders
Produced by Ry Cooder
Musicians (in alphabetical order)
Octavio Caldero
Joachim Cooder
Ry Cooder
Angel Terry Domesch
Ibrahim Ferrer
Ibrahim Ferrer Jr.
Manuel Galbán
Roberto García
Hugo Garzón
Carlos González
Juan de Marcos González
Rubén González
Pío Leyva
Manuel "Puntillita" Licea
Orlando "Cachaíto" López
Manuel "Guajiro" Mirabal
Eliades Ochoa
Gilberto "Papi" Oviedo
Alejandro Pichardo
Yanko Pichardo
Omara Portuondo
Jesus "Aguaje" Ramos
Salvador Repilado
José Antonio Rodríguez
Compay Segundo
Benito Suárez
Barbarito Torres
Aradito Valdés
Roberto "Virgilio" Valdés
Lázaro Villa

이 영화의 리뷰는 오래도록 미루어져 왔었다. 그러니까 대략 8년전,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이 한국에 개봉되던 2001년, 그 해 영화를 보려했지만 어쩌다보니 (그때나 지금이나 난 보고픈 영화를 놓치기 잘하고 늘 뒤늦게서야 찾아보는 경우가 빈번하다, 어쨋든 뒷북일망정 꼭 보게는 되더라) 상영관에서의 유효기간은 다 지나가고 말았다. 뭐 언젠가는 보게 될꺼야 라고 생각하니 그 다음엔 오히려 영화보다 음악에 더 관심이 갔다. 그 후 출시된 음반을 냉큼 구입해서 그 해 여름내내 들고 다녔었고 몇 해를 주기적으로  OST를 듣곤 했다. DVD역시 나오자마자 구입했지만 이제껏 영화를 틀진 않았다. 굳이 이유를 대자면 이 영화는 꼭 극장에서 스크린을 통해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음악은 제목부터 맴버들 이름까지 거의 다 알고 있었지만 정작 빔 벤더스와 라이 쿠더의 손과 발품으로 만든 이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기까지는 무려 8년을 기다려야 했다.

2009년 8월 12일 수요일 씨네큐브 저녁 8시 40분 마지막 횟차를 이번엔 다행히 놓치지 않았다.

음악은 너무도 귀에 익은 곡들이었고, 라이 쿠더나 이브라임 페레, 루벤 곤잘레스, 콤파이 세군도 역시 친근한 이름들었으므로 첫 장면부터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장소, 그 곳의 지인들을 찾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영화는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콘서트 실황장면과 <부에나비스타소셜크럽> 맴버들 한 사람 한 사람들의  인터뷰 과정이 순차적으로 교차되면서 진행된다. 이를테면 무대위에서 노래하는 이브라임 페레의 모습이 비춰지고 그 다음엔 쿠바에서 진행된 그의 인터뷰 내용이 이어진다. 그 다음은 또 다른 맴버들식으로. 단순한 구성과  편안한 분위기속에서 뮤지션들의 음악과 삶을 기억하고 노래한다.  모든 다큐가 그렇듯 그 안엔 진실(혹은 진솔함)을 향한 애정과 열정이 깃들어 있지만 오버해서 불편해지는 일은 없다. 음악자체를 좋아하고 그 즉흥성을 즐길 줄 알고 그래서 삶의 절반 이상을 함께 할 수 있었던 그들, 그 사람들의 이야기와 에피소드, 추억들로 충만하다. 쿠바 음악에 매료되어 '환영받는 사교클럽' 이라는 뜻을 지닌 <부에나..>의 옛 맴버들을 찾아  하바나를 향해 길을 떠나는 라이 쿠더와 그의 아들 요하임 쿠더의 여정을 보면서 '모터 싸이클 다이어리' 의 한 장면이 떠오르기도 했다. 강열한 블루와 오렌지의 대비, 그리고 갈색빛으로 터질것같은 쿠바의 풍광은 분명 이 영화의 또 다른 매력이다.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 의 맴버들은 모두 다 뛰어난 뮤지션이고 주인공들이지만 그들 중 4사람을 소개해 본다.

이브라임 페레, 구두를 닦다가 노래를 하게 되었다고 어린시절을 회상하는 이 노인의 눈빛은 어찌나 똘망똘망한지 마치 어린아이의 순진한 눈빛을 바라보는 느낌이다. 물기가 어린듯한 눈빛처럼. 암스테르담 공연의 성공덕분에 이루어진  카네기홀 공연을 위해 미국을 난생 처음 여행하면서  그 고마움을 라이 쿠더에게 돌리며 정말 아이같이 기뻐하던 모습, 오래도록 기억할듯..












꼼빠이 세군도, 이 분은 무려 1907년생!! 맵버들중 가장 어른신이다. 하지만 아흔이 넘었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노익장을 보여주신다. 보컬과 기타연주는 물론이고 그 기억력과 말빨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아직도 여인과의 사랑을 꿈꾼다며 인터뷰에서 "여인과의 하룻밤 사랑은 이세상 어느것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 이라고 말 하는데 정말 이분이라면 평생 그런 사랑을 했을듯. 몇 년전 작고하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루벤 곤잘레스는 피아니스트이다. 왠지 한때 천재 피아니스트라는 소리를 들었을 것 같은 분위기의 소유자다. 랍비같기도하고 과학자같이 보이기도 하고 연약함과 강단이 동시에 느껴지는 신비로운 사람. 그런데 실제로 그는 어렸을적부터 매우 탁월한 재능을 지닌  피아니스트였고 동시에 의학을 공부하는 의학도였다. 낮에는 의사로서 밤에는
피아노 연주자로서의 삶을 꿈꾸었지만 워낙 쿠바음악에 대한 애정이 넘쳤는지라 결국 의대를 그만두고 하바나로 가서 쿠바음악을 전공하는 뮤지션이 된다. 그 후로 곤잘레스만의 독특한 스타일의 피아노연주를 터득했고 쿠바음악의 독보적인 존재가 되었지만 노년에 이르러선 관절염때문에 피아노연주를 전혀 할 수 없었던 시기도 있었다.  하지만 라이 쿠더의 <부에나..>프로젝트에 참여 일흔 일곱이라는 나이에도 놀라울만큼 역동적이고 생생한 피아노 선율을 들려준다.



오마라 포르토운도,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의 디바, 맴버중에서 가장 젊고 매력적인 할머니다. 쿠바의 거리를 활보하는 그녀는 젊은 아가씨적의 생기발랄함을 잃지 않았다. 그 나이에도 사랑과 열정이 어색하지 않은 여인. 영화속에선 이브라임 페레와 듀엣으로 부루는 장면이 여럿 나온다. 

* 지금 흐르는 음악은 꼼빠이 세군도와 오마라 포르토운도가 함께 부르는 'Veinte Anos'(베인떼 아뇨스)이다. 중독된 고독이라는 뜻이란다.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음반의 7번째 트랙이며 가장 즐겨 들었던 음악중의 하나이다.